[데스크라인]또 그 얘긴가

숨이 끊어져 가던 벤처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는 상당기간 수출 호황, 내수 침체의 양극화로만 치달아 왔다. 작년까지 수출주도형 대기업들은 사상 최고의 실적을 분기마다 갈아치우는 신기록 행진을 계속했다. 하지만 내수주도형 벤처들은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자금도 마찬가지다. 돈이 넘쳐나는 대기업들에는 돈을 써달라고 안달이었지만 벤처들은 예전보더 더 심한 돈가뭄으로 허덕였다. 그러다 보니 오갈 데 없는 돈은 부동산이다 뭐다로 몰리면서 세상을 또 한 번 어지럽게 했다.

 다행히 정부의 적극적인 진흥책 때문인지 아니면 자발적인 노력 덕분인지 최근 벤처들은 봄의 새싹처럼 부활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좀처럼 멈추지 않던 내수 침체도 바닥을 쳤다는 반가운 얘기가 들린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동맥과 대정맥만 있어서는 안 된다.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실어나르는 실핏줄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벤처는 산업계의 실핏줄이나 다름없다. 벤처가 살아야 산업 전체가 시들지 않고 생기가 돌 수 있다. 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반가운 소식들 틈에서 걱정스러운 현상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벤처들이 1000억 클럽이니 2000억 클럽이니 하는 모임을 만든다고 한다. 정부도 중핵기업을 육성한다며 중소기업을 매출 2000억원, 수출 10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한다. 예전 벤처거품의 부작용이었던 덩치지상주의가 함께 살아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몇년 전이다. 코스닥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상장기준을 매출 100억원 이상으로 잡았었다. 결과는 만신창이였다. 건강하던 벤처마저 상장을 위해 억지로 매출을 늘리려다 빈 껍데기가 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준을 완화하기까지 했다.

 이 뼈아픈 경험은 지금도 유효하다. 벤처는 결코 덩치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핵심기술과 해당분야에서의 경쟁력이 열쇠다. 덩치가 작더라도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면 유망벤처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커 나갈 수 있다.

 아직도 조립산업시절 규모의 경제에 함몰돼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21세기 정보화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다. 규모가 아닌 세계 최고의 기술이나 세계 1위 점유율과 같은 질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다. 어중간한 덩치만으로 덤볐다간 큰 코 다친다.

 중핵기업도 목표가 매출이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중소업계 스스로 매출이 아니라 기술이나 세계시장 점유율에서 으뜸이 될 수 있는 기업이어야 한다고 소리 높이고 있다.

 설마 벤처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하는 1000억 클럽, 2000억 클럽이 덩치지상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핵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정책에 편승한 안이한 발상이 아닌지 의심 또한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칫 1000억 클럽이 매출규모만으로 평준화된 모임이라면 결단코 반대다. 기술이나 시장에서 톱 반열에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매출 1000억원이 중요한 게 결코 아니다. 상장기준이 100억원 이상이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보다는 기술이나 세계시장 지배력을 구심점으로 클럽을 결성하는 게 어떨까. 평면적인 평준화는 인성을 중시하는 교육계만으로 충분하다. 정부도 평준화된 산업정책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시점이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될성 부른 떡잎을 골라 튼튼한 나무로 키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성호 디지털산업부장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