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바닥에서 가장 선호도가 낮은 장르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 중에서도 비행 시뮬레이션은 최악이다. 108개로 구성된 키보드의 모든 키 사용법을 전부 기억해야 하며 이륙부터 비행, 전투, 착륙 등 실제 비행기와 조금도 다름 없는 조작을 수행해야만 하는 게임이다.
그나마 전투기가 테마라면 공중전을 벌이는 재미라도 있지만 세스나 등 민간 비행기를 몰게 되면 그야말로 죽음이다. 하지만 비행 시뮬레이션에 푹 빠진 마니아들은 다른 어떤 게임보다 이 장르를 선호한다. 그 중에서도 ‘팰콘’ 시리즈는 비행 시뮬레이션의 최고봉으로 장르의 기본 골격을 완성했으며 실제 비행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여기는 편대장, 1호기 3호기는 지상 타깃을 공격하고 2호기와 5호기는 호위하라.”
“여기는 1호기, 알았다. 오버∼”
“여기는 2호기, 앞에 서겠다. 오버!”
“여기는 3호기, 누가 먼저 타깃을 잡는지 저녁 내기다. 오버.”
“편대장이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무사히 귀환하라. 오버.”
마치 ‘탑 건’의 한 장면같지만 PC와 모니터, 각종 콘트롤러로 무장한 ‘팰콘’ 유저들의 편대비행 상황이다. 이 작품은 극도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유저들의 자세도 다른 게임과 다르다. 진지한 표정과 고가의 장비로 무장한 그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비행 전술과 전투 방법 등을 강의하고 인터넷을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실전처럼 날아 다닌다.
실제 전투 파일럿이 “ ‘팰콘’은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없다. 하나의 시뮬레이터다.”라고 밝힌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최근까지 해외에서 개발된 비행 시뮬레이션 중에서 ‘팰콘’을 능가하는 것은 없으며, 개발사는 게임으로 즐기는 비행의 모든 기준은 ‘팰콘’에 맞추고 있는 게 현실이다.도대체 얼마나 사실적이길래 일반 유저들은 어렵다고 난리일까? 아주 간단한 예로 이륙을 보자. ‘팰콘’이 존재하기 전에는 비행 시뮬레이션도 단순했고 주로 액션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륙조차 F16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일단 엔진 시동을 켜고 브레이크를 풀고 천천히 격납고에서 활주로로 나온다(이 과정에서 포기하는 유저도 많다. 전투기와 자동차 운전은 확실히 다르다).
활주로의 출발점에 정확히 위치하고 신호에 따라 엔진 출력을 높인다. 활주로가 끝나기 전까지 충분한 출력을 얻어 힘차게 날아 오른다. 곧바로 위치를 잡고 바퀴를 접어 적정 고도까지 올라간다. 고도에 오르면 목적지를 향해 기체를 선회시킨다. 여기까지를 이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명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유저는 이륙하면서 중심을 잡지 못해 추락했다. 출력을 높이는 것조차 어려워 활주로를 벗어나는 상황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일단 조종에 익숙해지면 ‘팰콘’은 하늘을 나는 기쁨을 선사했고 유저들은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대리만족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여기에 멀티플레이를 통한 편대비행과 각종 다양한 임무들은 그 어떤 게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묘한 중독성을 일으켰다. 이륙에 성공해서 기쁘고 창공을 가로질러서 즐겁고, 공중전으로 재미있고 착륙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그런 작품이었던 것이다.하지만 ‘팰콘’의 창조자 길만 루이는 이 게임을 개발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넥사를 창립해 액티비전, 에픽스와 공동 작업을 하던 길만 루이는 1983년 일본인 사업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길만 루이는 MSX용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전투기는 F15나 F16이 대상이어야만 했다. MSX 시스템은 일본의 ACSⅡ에서 고안한 컴퓨터 운영 체계였고 미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MSX는 램이 불과 16K에 16K 용량의 카트리스로 게임을 지원하는 생소한 컴퓨터였는데 길만 루이는 이 제안을 받아 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전설의 ‘파이팅 팰콘 F16’이다.
길만 루이는 평범한 전투 비행보다는 실제와 흡사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삽입해 이 후 개발될 모든 비행 시뮬레이션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작품은 두 대의 컴퓨터를 통한 공중전이 가능했으며 비행 전용 조이스틱을 지원했다. 쉽게 말해 공중전 멀티플레이를 완성한 것이다.
처음 게임이 등장했을 때, 길만 루이와 관계자들은 만장이면 만족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으나 10만 장이 넘는 대박을 터뜨렸다. 1985년에는 미국 시장에서 버전을 달리해 출시했는데 역시 많은 호응을 얻었다.하지만 총 4편이 발매된 ‘팰콘’은 2편부터 난산을 겪어야 했다. 루이 길만은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와 합병을 희망했고 새로운 유통사를 만들어 ‘팰콘’을 매킨토시 버전과 아미가 버전으로 출시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루이 길만의 희망은 성사됐으나 스펙트롬 홀로바이트는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팰콘’은 1987년에 IBM PC로도 출시돼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군사장비 업체 제네랄 다이나믹스에서 군사용 프로그램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이는 실제 비행사들과 공동 작업을 진행하면서 실제 비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 진 것이 ‘팰콘’의 3편째 역작 ‘팰콘 3.0’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개발되는 동안 스펙트럼 홀로바이트는 파산의 위기에 몰렸고 루이 길만은 개발과 경영의 두 가지 힘겨운 싸움에 지쳐갔다.
결국 ‘팰콘 3.0’은 예정보다 출시가 늦어지고 자금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불완전한 상태로 발매되고 말았다. 출시 후 여러 번의 패치를 통해 겨우 안정화를 찾은 이 게임은 그 뒤부터 판매량이 솟구쳐 루이 길만은 다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리고 이 자본을 토대로 마이크로프로즈를 인수해 회사의 덩치를 더욱 키웠다.
이 때부터 마이크로프로즈는 각종 전투 장비 시뮬레이션의 명가로 이름을 높이게 되지만 루이 길만은 합병 이후 많은 갈등을 겪었고 결국 회사를 떠나 CIA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불행은 팰콘의 마지막 작품 ‘팰콘 4.0’까지 계속됐다.
1998년 12월 해외에서 대성공을 거둔 ‘팰콘 4.0’은 국내에서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작품은 한반도를 분쟁 지역으로 설정하고 북한과 남한, 미군의 군사 대결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당연히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한반도의 자세한 군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북한의 군사 기지를 한국 유저가 미군 전투기를 몰고 공격한다’라는 이미지가 너무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년 후 2001년 아타리 코리아를 통해 이 작품은 일부 삭제된 상태로 정식 출시됐다. 국내 일부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나 실제 케이스를 뜯어 본 게이머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동봉된 대형 지도에 ‘동해’를 ‘일본해’로 떡 하니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발매 첫날부터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아타리 코리아는 서둘러 진화에 나서 2차 물량부터 수정된 지도를 증정했으나 유저들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게임성만큼은 최고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 외로 좋은 판매량을 보였고 2004년 3월 다시 발매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성진기자 김성진기자@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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