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서 혹 여의도 인근에 서식하는 한 무리의 집단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어른들의 인사는 2가지였다. “아침 자셨습니까?”(점심때면 점심 자셨습니까?로 바뀌고, 저녁에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아직 전기가 귀하고 대개 새벽같이 일어나서 활동하던 시절이라 저녁에는 별로 다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어디 가십니까?”다.
그때 한 외국인이 이렇게 쓴 글을 본 기억이 난다. “한국인들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법을 갖고 있다. 남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을 왜 그렇게 마구 할까?, 남이 식사를 했는지 여부가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일상적인 인사말에 대해서도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가 있구나’라는 게 어린 마음에 첫 느낌이었지만, 그 뒤로 이 외국인이 문화적으로 상당히 무지하거나, 아주 성실하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는 전형적인 농경문화기의 끝물 무렵이었다. 마을은 대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고, 모두들 한집안이나 진배가 없다.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 보릿고개가 오면 너나없이 하루하루 사는게 팍팍하게 마련인 시절이었다. 그때 “아침 자셨습니까?”는 남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따위의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동구밖으로 나설 일이 없던 농경문화기의 집성촌에서, 길을 나서는 집안 어른을 보고 “어디 가십니까?”라고 묻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터이겠고.
시간은 많이 흘렀고, 농경문화의 시대는 지나갔다. 보릿고개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고, 그새 인사말도 “안녕하세요”가 아니면 “하이루 방가방가 ^^*”로 바뀌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올해에는 정부의 조달 관행이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에 대해 무작정 가격으로 조달업체를 결정하는 관행도 도마에 올랐고-보이지도 않는 소프트웨어를 품질도 보지 않고 어떻게 값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인지가 참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일정 규모 이하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대기업의 참가를 제한하자는 안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희한하게 여겨진 것은 정부가 정한 조달단가보다 더 싸게 관공서에 납품한 경우에는 그 업체에 차액만큼의 벌금을 물린다는 규정이었다. 게다가 싸게 납품할 것을 요청하거나 심지어 강요한 해당 관공서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정부에 조달을 하고 있는 IT 업체더러 “왜 조달단가보다 낮게 공급하셔서 벌금 낼 일을 자초하고 계시냐?’라고 한번 물어보라.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이 닿지 않도록 3m 이상은 떨어져서 물어볼 것을 권장하고 싶다.)
관공서가 조달단가를 지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기기묘묘하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를 대형 SI업체에게 맡기고, 필요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일체를 이 업체더러 사오라고 한 다음에, 각 소프트웨어와 서비스의 조달단가를 모두 합한 금액의 40% 쯤을 주면 된다. 덤핑을 강요한 것은 이 SI업체지, 정부는 아니다.
“리스로는 하드웨어밖에 구매할 수 없다”라고 규정이 되어 있으면 하드웨어 업체를 고른 다음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리스트를 주고 이것들을 모두 번들로 달라라고 하면 그만이다. 번들로 덤핑을 강요한 것은 관공서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조달단가보다 낮추어 공급한 사실을 들키는 날에 경을 치는 것은 작고 힘없는 업체의 팔목을 비튼 관공서도, 대형 SI 업체도, 하드웨어 업체도 아니다. 그러니 울며 겨자를 먹을 수 밖에. 이런, 이런…..
이런 사태의 큰 부작용 가운데 하나는, 본의 아니게 외국의 거대기업들에 아주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라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오러클은 아무리 잡고 비틀어봐야 팔목이 돌아갈 턱이 없다. 늘 제 값을 받아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고 힘없는 한국의 신생 IT 기업들이 몇 년동안 고생만 죽으라고 하다가 결국 문을 닫는 사이에, 해외 기업들은 잠재적인 경쟁자도 없이 무혈입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양잔디를 키우려고 제초제를 엄청 뿌린 골프장과 같다고나 할까.
한국의 IT 기업들의 이력이 결코 짧지 않은데도 변변한 패키지 소프트웨어 회사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한글과컴퓨터, 나모인터렉티브, 안철수연구소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데는 이런 배경이 없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조달사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조달업무의 가장 큰 과제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조달과정에서 부정부패를 없앨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떡값과 선물 그리고 뇌물의 경계도 지금보다는 훨씬 흐릿했던 시절이었다. 결정적으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라는 상품은 그때 조달품목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중요한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바뀐 세상은 새로운 잣대를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아침 자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할 수가 없게 됐다는 것이다.
정부의 업무의 효율성은 기업의 기준과는 달라야 한다. 가령 정부의 전기공급을 맡은 곳이 오직 비용 절감과 수익증대만을 생각할 때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정전사태와 같은 일이 생긴다.
정부의 IT 조달업무가 오직 비용 절감과 부정부패의 제거만을 생각할 때 토종 IT 중소기업의 도살과, 외국 대형업체의 독식 현상이 나타난다.
소프트웨어는 못이나 톱, 책상이나 철근이 아니다. 정부의 조달은 오직 비용을 깎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 수준의 품질 기준을 세워 민간기업의 품질 수준 향상을 유도하고-가령 미국 정부에 납품하려는 소프트웨어업체는 품질기준인 CMM 인증을 필수적으로 받아놓아야 한다-합리적인 마진을 보장해서 실력 있는 작은 중소기업이 튼실하게 커나갈 모판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공공의 이익이다. 몇푼 깎자고 몇백억, 몇천억 원을 놓쳐서야 쓰겠는가.
저 늘 식사하고 다닙니다. 더 이상 식사 하셨냐?고 물어보지 말아 주십시오.
◆ 박태웅 Profile
안철수연구소 이사. 경영지원실장. 칼럼니스트. 80년대 초반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글쓰는 일을 해왔다. 이제는 폐간한 <싸이버저널>과, KBS, MBC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에서 칼럼니스트를 지냈다.
◆ 필자가 독자에게 - 왜 `길에서 IT를 보다`인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된 의견을 내는데는 한평생의 경험으로도 모자라 보인다. 지도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아, 늘 길을 가면서도 주위 사람들에 물어볼 수 밖에. 길을 가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하듯이 IT와 함께 살아오면서 전하고 싶은 얘기를 드리고자 한다. 정하여 진 것은 없다. 길위에서, 다만 길이 기꺼이 보여주는 것들을 보고 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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