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랙탈 인사이트]사이버 타오이즘과 무의미의 시대

나는 사이버 공간에서 15년 가까이 살아왔다. 아마 사이버 나이로 치자면 우리나라에서 최고령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도 인터넷과 관련된 일을 주로 해왔기에 사이버 공간에 머무는 시간도 많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이 곳에서 특이한 사건이나 화제거리가 등장하면 누구보다도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엽기 신드롬도 그러했고 ‘폐인’ 과 ‘햏자’ 라는 유행어를 낳았던 ‘아햏햏’ 현상이나 최근의 ‘플래시몹’ 열풍까지 줄곧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현상을 탐색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실은 ‘아햏햏’ 나 ‘플래시몹’ 현상이 인터넷공간의 근본적 속성에 매우 충실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 이었다. 그러면서 이 현상이 왜 수년 전부터 지금과 같은 시대에, 또 우리나라 사이버 공간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는지 그 이유를 시대, 사회, 공간이라는 다각도 관점에서 살펴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햏햏’ 나 ‘플래시몹’ 을 그저 유희적 무의미로 생각할 뿐이다. 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함께 들어가 보자.

기준이 없는 시대

지금은 상대주의 가치관이 휩쓸고 있는 시대다. 20세기 후반부터 시대의 전면에 등장한 탈 근대(포스트 모던) 움직임도 그렇고, 인간의 만족을 가장 우선시하며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인본주의 성향도 그 근본을 헤아리기 위해선 상대주의 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용어는 없는 듯 하다. 당연히 절대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어떠한 절대적 가치가 옳지 않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절대성 자체를 부정하고 희석 시키는 무의식적 흐름이 보인다.

그 동안 우리는 사물을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젠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물을 관계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점이 가장 큰 세대간 가치관의 충돌이다. 관계는 항상 변하고 움직인다. 움직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적인 물질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안하고 생활의 초점을 잃는다. 심지어 놀이조차도 동적세계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적인 고민거리로 등장한 온라인 게임 중독 현상도 결국 늘 변하고 움직이는 게임세계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나타나는 생활질서의 왜곡현상에 다름 아닌가. 기성세대의 모습에서 보면 온라인 주식거래에 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완벽한 닮은꼴이다. 항상 변하는 주식값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생활의 기준점도 늘 변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단 이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을 느끼며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일과 여가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학교와 사회의 영역도 뒤섞여 돌아간 지 오래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물리적 시간보다 상대적 시간으로 판단한다. IT 업계에선 3개월을 1년과 같이 여긴다. 한 이동통신업체의 광고에선 60대 대학생과 20대 교수를 내세워 시대적 상대성을 자사의 키워드로 이용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동적인 세계에서 젊은 세대는 그 흐름 위를 유연하게 서핑 한다. 문제는 목적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넷, 상대적 공간의 실체

인터넷 만큼 상대적인 공간이 있을까? 이 곳에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꾸어 놓는다. 전자상거래를 보자 값싸고 좋은 물건을 공급하는 것 보다 그 물건을 원하는 대상과 적정한 관계를 맺는데 더 본질적인 사업성이 있다. 온라인 게임이든, 채팅이든 대다수의 젊은 이들이 열광하는 사이버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은 관계작용이다.

관계 가치란 상대적인 해석을 낳는다. 오래된 책장은 본질가치나 효용가치가 매우 낯은 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라도 가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경매 사이트에 올리면 생각외의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 이를 바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사이버 공간을 서핑하다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사이트들이 부지기수로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이트를 찾고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전 같으면 하잘 것 없는 개인적 관심사들이 수많은 인터넷 이용자의 잠재의식과 만나면서 관계가치가 만들어진다. 이렇다 보니 인터넷 공간에서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물론 현실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인터넷 공간에서는 나름대로의 관계가치를 드러낸다. 포르노와 같이 쓰레기로 치부하는 정보마저도 끊임없는 수요자 덕택에 상당한 경제가치를 생산하는 컨텐츠로 인정되는 실정이 아닌가. 또한 인터넷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모호하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보자. 인터넷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실체가 갑자기 며칠 새 전 세계에 퍼져 양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이때마다 바이러스는 인터넷 세계의 핵심주제로 등극한다. 중심과 주변의 논리는 무의미할 뿐이다.

인터넷, 새로운 영적 공간

인터넷에 접속해서 웹브라우저를 띄우는 순간 몸은 현실에 있을지라도 인식체계는 비물질 공간으로 들어간다. 온라인 게임에 몰입하는 현상은 바로 인식체계가 현실공간을 버리고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비물질 세계로 이동되기 때문이다. 케빈켈리 Kevin Kelly 같은 사이버스페이스 옹호론자들은 이곳을 인공두뇌학적 신성능력을 지니고 있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장래에 인간의 정신을 다운로드 할 수 있을 것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육체를 벗어난 영원한 생명이 가능한 비물질 세계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가 현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점은 이들이 인터넷 공간을 일종의 영적 체험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SF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 같지만, 게임에 몰입하여 자신의 전 존재가 게임 공간에서 사는듯한 체험은 이러한 가능성을 언뜻 비치기도 한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라잡고 있는 영적추구에 대한 본성이 인터넷공간이라는 비물질 공간을 만날 때 일종의 종교성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인터넷, 노자, 김용옥

수년 전 장안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김용옥씨의 노자 TV강연을 기억할 것이다. 이 강연은 엔터네이너 기질을 가진 한 철학자의 캐릭터와 노자라는 주제와 시대의 흐름이 절묘하게 만났던 사건이었다. 인터넷 문화를 말하면서 노자와 김용옥이 무슨 관계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관계가 있다. 적어도 의식의 흐름에 있어선 꽤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방송을 진행한 PD는 이 방송이 관심을 끈 비결로 “노자철학”이라는 아이템을 지목했다. 반자본주의, 환경, 여성 등을 기본구도로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사상이 뉴밀레니엄과 맞아 떨어졌다고 분석한다. 개화기 이후 서구문명 깃발을 향해서 일제히 달려왔는데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노자철학을 거론해 관심을 끌 수 있었다고 한다. 담당 PD가 이렇게 말했다면 근대성에 대한 반동의 흐름인 탈근대(포스트 모더니즘)와 노자철학과는 원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얘기다. 노자에 대한 김용옥씨 자신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평생 노자와 더불어 살면서 노자에게 배운 가장 큰 교훈을 꼽으라면, `삶의 양면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삶의 양면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삶의 양면성`이란 `삶의 이중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삶의 이중성? 좀 기분 나쁘게 들린다. (중략) 노자적인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이나 이중성이란, 일면을 계산하여 타면을 악용하거나 일면에 집착하여 타면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면을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이중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상대적 가치에 대한 전관(全觀)이다.” - ‘노자와 21세기’ 중 에서

자 이제 뭔가 보이지 않는가?. 노자에 대한 고백으로 드러난 김용옥씨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바로 상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주의가치관 시대에 김용옥이란 철학자가 무위(無爲)의 철학인 노자를 강연했다. 지식인 사회의 반향은 냉랭했지만 일반인에겐 가벼운 타오이즘(도가사상)이 형성될 만도 했다. 나는 노자사상을 논할 만한 입장은 못 되지만, 노자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이 상대주의적 관점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은 기본적인 상식 선에서도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초입에 초자연주의 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판타지를 필두로 신화에 대한 관심, 역술의 부상, 기수련과 같은 초월적 관심사가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출판시장에서도 자연주의적 경향이나 무위자연을 노래한 초월적 삶을 다룬 책들을 잇달아 출간한다. 유명한 저술가의 현학적 문장보다는 시골 촌로의 달관한 듯한 자연주의적 편지 글이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이러한 타오이즘 경향은 뉴에이지(Newage) 흐름과도 영합한다.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 상대주의, 인터넷, 변화가 일상인 시대, 사람들은 내면적인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있고 이제 무엇인가 초월적인 기대밖에 남은 것이 없는 듯 보인다.

유희적 무의미, ‘아햏햏’와 ‘플래시몹’

이제 ‘아햏햏’와 ‘플래시몹’과 같은 인터넷 문화현상으로 돌아가 보자. 마치 별 것 아닌 현상을 두고 거창하게 돌아온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인터넷 문화현상에서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현상은 의도하지 않는 발생이라는 사실이다. ‘아햏햏’ 현상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했다. 최근의 ‘딸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플래시몹’ 역시 한 사람의 의도하지 않은 메일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의미를 찾는 가벼운 타오이즘은 이미 시대와 우리사회와 사이버공간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햏햏’나 ‘플래시몹’과 같은 문화현상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나름대로의 무의미를 즐긴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은 의미마저도 무거운 것을 가볍고 단순한 것으로 탈바꿈 시키는 마법이 있다. ‘아햏햏’나 ‘플래시몹을’ 즐기는 사람들은 세상을 달관한 듯한 무의미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미 가벼운 타이오즘도 아닌, ‘유희적 무의미’ 만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결국 인터넷 공간에서 소비적 존재로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아햏햏’나 ‘플래시’몹은 상대주의 가치관시대에, 가장 상대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적 관점을 논하는 무위자연의 타오이즘 경향이 일정의 무의식적 영적 성향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의 특성상 시간일 갈수록 표피적인 유희만 난무할 것이다. 사이버공간은 ‘아햏햏’나 ‘플래시몹’을 태동 시키고 확산 시켰지만 또한 이를 단순한 부유물로 희석한다. 이 점이 사이버 공간이 갖는 한계이자 속성이다. 모든 것들이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시대에 이들의 모습을 본 따고 무의미를 향유하는 족속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이 더욱 심해져 가는 모습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인터넷공간에서 촉발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현상은 앞으로도 그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현상자체에 대한 반응이나 해석역시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현상을 시대와 사회와 공간의 흐름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는 있다. 움직이는 시대에 어떠한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동적인 시각을 지녀야 할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왜 모두들 서핑만 하고 있는 것일까?

◆ 홍윤선 yshong@webstage.co.kr

필자는 우리나라 인터넷 1세대로, PC통신 유니텔과 포털사이트 네띠앙 대표를 거쳐 웹스테이지 대표로 활동 중이다. 현재 e메일을 이용한 회원관리 마케팅 서비스 오즈메일러(www.ozmailer.com)을 운영하고 있으면 인터넷 문화 칼럼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클릭네티켓(2000, 중앙M&B)`과 인터넷 문화비평서 `딜레마에 빠진 인터넷(2002, 굿인포메이션)`이 있으며, 인터넷을 `문화`로 바라보고 해석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홍윤선의 프랙탈 인사이트`는

`프랙탈`은 부분이 전체를 드러내고, 전체가 일부를 반영하는 카오스적 속성을 뜻하는 과학용어입니다. 눈(Snow)의 결정입자가 무한히 반복되는 모습에서처럼, 부분인듯 전체이고 전체인듯 부분의 역할을 하는 속성을 뜻합니다.

사이버 공간은 부분이 전체처럼, 전체가 부분처럼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사회의 일부에 해당하는 인터넷의 문화적 현상을 통해 사회전체를 조명하기도 하고, 반대로 사회현상을 통해 인터넷 문화를 해석하기도 하는 관점에서 통찰력있는 문화적 공감대을 나누고자 하는 글쓰기 의도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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