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연말연시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되고, 덧없이 나이만 먹는 것에 절로 한숨이 나는 탓이다.
그렇다고 탄식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 특히 평소 잊고 지내던 이, 혹은 감사했던 이에게 조그만 성의라도 보인다면 연말연시가 한결 훈훈해 질 수도 있을 게다.
어느 30대 주부의 알뜰 일기를 살짝 엿봤다.
2003년 12월 9일.
맞벌이부부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부러워 하지만 이는 속내를 모르는 소리다. 버는 만큼 쓴다고, 초등학교 1, 2학년인 아이들 뒷바라지에 시부모님 용돈 드리고 대출금까지 넣고 나면 생활비도 넉넉지 않다. 더구나 예년같으면 연말이라고 특별상여 덕택에 숨통이 트였겠지만 올해는 자리보전이라도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처지니, 이를 어쩌랴.
12월. 연말 기분도 기분이지만, 이보다 돈 나갈 일이 만만치 않다. 더구나 내년에는 설날이 1월에 있어 더욱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마침 이런 얘기를 옆집 아줌마한테 했더니, 숨겨진 비법을 알려줬다. 백화점에서 비싼 선물 사지 말고 직접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연말을 그냥 넘기기는 아쉽고 가족에게도 미안하던 차에, 올해는 `추억과 사랑이 가득한 선물`로 컨셉트를 잡기로 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던지….
12월10일.
직접 선물을 만들기로 마음 먹고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지니 정말 알짜 정보가 많다. 저렴한 가격에 준비해서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목걸이나 묵주, 귀걸이 같은 공예물은 시장에서 구슬을 좀 사서 엮으면 될 것 같고, 철사공예도 힘 좀 쓰면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남편한테는 편지나 시집으로 대신해야지.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 가슴속 이야기를 담아서 선물하는 거야. 휴대폰으로 음악도 한 곡 선물하고.
시계와 달력도 맞춤형이 인기라는데. 이것도 한 번 해봐야지. 우리 가족만의 소중한 시간과 추억이 담겨 있는 달력이라니, 얼마나 멋질까. 더구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달력이잖아. 아이들도 분명 좋아할 꺼야.
12월11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뭔가 특별한 상차림으로 분위기도 바꿔봐야겠다. 외식하자니 길도 막히고,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있노라면 십중팔구 기분을 망칠 테니 말이다.
집에 있는 양초에 금·은색 페인트를 입혀 식탁 한 쪽에 놓고, 유리그릇에 물을 담아 장미꽃 몇 잎을 띄워 봐야지. 식탁 테이블보는 작년에 사 둔 빨간색 테이블보를 꺼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돈다. 크리스마스 생각에 가슴 설레기도 하고. 문득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떠오른다. 남편은 아내에게 빗을 선물하기 위해 시계를 팔고, 아내는 남편 시계에 어울리는 시계줄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판다는….
<정은아기자 ea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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