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하철과 관공서, 은행의 벽들에서 그를 만나 왔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는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모습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늘 벌건 배경 위에 타다 만 성냥의 모습이 아니면, 작은 불씨 모양을 하고 있다. 불씨는 작지만 대개 불꽃은 크다.
이쯤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불조심 포스터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늘 화재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정말 작은 성냥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화재의 가장 큰 이유일까? 이제는 어쩌다 8각의 UN 성냥통을 만나면 꼭 난리 통에 헤어졌던 친척이라도 만난 것마냥 반갑기도 할 정도인데….
웹에서 찾아본 한국소방안전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화재의 가장 큰 원인은 누전이다. 합선이거나 뭐 그런 이유일 것이다. 2002년 일어났던 32,966 건의 화재 가운데 11,202 건이 전기로 인한 화재다. 성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2위인 담배는 3,847건으로 전기의 34%에 불과하다. 3위는 놀랍게도 ‘방화’로 2,778건이지만, 2위와 3위를 합해도 1위의 60%에 미치지 못한다.
불은 전기 때문에 나는데, 아직도 구호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다. 별 혐의도 없는 성냥개비는 아직도 수배자 전단에 올라 있다. 이제는 놓아줄 때도 되었다. ‘살인의 추억’도 공소시효가 있지 않던가.
성냥개비는 불조심 포스터에만 있는게 아니다. 나는 젊은 개발자들을 볼 때면 적지 않게 자주, 그들이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에 절망하고, 그들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교육을 그리워 한다.
대학교에서 배출하는 젊은이의 90% 이상은 교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뛰어드는 곳은, 고시공부나, 한의대 같은 예외가 아니라면 대개 개발회사일 것이다. 그들은 ‘회사’에서 ‘개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학교는 오래도록 교수 후보자를 가르치는데 집중해온 것처럼 보인다. 개발자를 가르친다고 하는 곳도, 마치 그 학생이 ‘혼자서’ 개발을 할 것처럼 가르치고, 개발과정에는 이른바 ‘다큐멘테이션’이라는 과정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가르치고, 큐에이가 필요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개발이란 대개 고독한 천재들이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 외로이 하는 일인 것처럼 배우고 나온 젊은 개발자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마치 어제 막 화성에서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처럼 낯설다. 그는 개발 프로세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개발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지리한 단순작업의 반복이며 정성들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야 완성되는 팀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들은 적도 없다. 그는 문서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QA를 거쳐야 비로소 제품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오로지 불을 막기 위해 성냥개비만 지켜보다 졸업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젊은 화성인이, 수십 년 묵어 이제는 누렇게 바랜 족보처럼 여겨지는 ‘학자용’ 커리큘럼들을 되풀이하는 그 시간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사람의 일은 거의가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이라는 것을, 제품 개발에는 길고 지리한 문서 작업과, 큐에이가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을,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기를 소망한다.
1937년 당시 소위 모던이라 일컬어지던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 기생 • 배우 등이 서울의 치안 담당자에게 유명한 공개 탄원서를 제출했다. 문예부장들과 똑 같은 심정을 담아 그 탄원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잡지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글이다.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일본제국 판도내와 아시아 문명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 함은 심히 통한할 일로, 이제 각하에게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중략……하루속히 서울에 딴스홀을 허락하시어, 우리가 동경갔다가 `후로리다홀`이나 `일미홀`등에 가서 놀고오는 것같은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시민들도 맛보게 하여 주소서."
나도 진심으로 젊은 화성인들과 소통하고 싶다. 그들과 함께 후로리다홀이나 일미홀의 유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늙어 어디 부킹도 들어올 일이 없겠지만…).
◆ 박태웅 Profile
안철수연구소 이사. 경영지원실장. 칼럼니스트. 80년대 초반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글쓰는 일을 해왔다. 이제는 폐간한 <싸이버저널>과, KBS, MBC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에서 칼럼니스트를 지냈다.
◆ 필자가 독자에게 - 왜 `길에서 IT를 보다`인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된 의견을 내는데는 한평생의 경험으로도 모자라 보인다. 지도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아, 늘 길을 가면서도 주위 사람들에 물어볼 수 밖에. 길을 가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하듯이 IT와 함께 살아오면서 전하고 싶은 얘기를 드리고자 한다. 정하여 진 것은 없다. 길위에서, 다만 길이 기꺼이 보여주는 것들을 보고 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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