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부 CC인증 확대 정책이 `부채질`
올들어 수면 아래로 사라졌던 보안업계의 인수합병(M&A) 움직임이 서서히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매물은 쌓여 있는데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던 지난해와는 달리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M&A를 선언한 업체가 등장하는가 하면 내부적으로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업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내년 초에는 구체적인 보안업계의 M&A 윤곽이 드러나 보안시장의 최대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총알은 준비됐다=M&A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자금의 여유가 있는 보안 업체를 중심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코스닥 등록과 외자 유치로 들어온 400억원의 자금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니텍은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공개키기반구조(PKI) 암호인증 기술을 응용할 수 있는 솔루션 업체를 물색 중이다. 지난 9월 열린 이사회에서 M&A 추진에 필요한 승인을 받았으며 김재근 사장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김재근 사장은 “아직 이렇다 할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M&A의 가능성은 열려있다”며 “무엇보다 대상 업체가 수익을 낼 수 있는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안철수연구소는 보안 업체 가운데 가장 풍부한 500억원 가량의 자금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전에 M&A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항상 M&A 주체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 안철수 사장은 이에 대해 “조건이 부합될 경우”라는 표현으로 원론적 차원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안철수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서는 M&A이 또 이뤄질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기존에 인수한 업체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명했다.
상반기 사옥 매각으로 자금을 확보한 닉스테크는 M&A에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이다. 이 회사 박동훈 사장은 “아직 대상 업체는 정하지 않았지만 M&A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며 강한 의지를 밝혔다. 박사장은 “과거 PC보안 위주에서 종합보안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면서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가상사설망(VPN) 분야나 보안서비스 분야의 몇몇 업체가 M&A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분위기다.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M&A 움직임이 수면 위로 다시 부상한데는 최근 세계 보안 시장에 불고 있는 M&A 바람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시만텍, 네트워크어소시에이츠, 넷스크린 등 보안 업계의 선두주자들이 잇달아 다른 보안업체를 인수하면서 그 파장이 곧 국내에도 밀어닥칠 것이라는 예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또 2005년 CC인증 확대 실시라는 정통부 방침이 구체화되면서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만들지 않고는 외국 업체와 경쟁을 벌이기 힘들다는 분석도 M&A의 가능성을 부채질하고 있다.
여기에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벤처기업의 M&A을 촉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비가 필요하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미리 준비를 하면 보다 효율적인 M&A이 가능하다는 기대감도 이면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 보안업체의 사장은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M&A 시장에 매물은 나와 있지만 가격에 대한 시각 차이가 너무 커서 진전이 없었는데 최근 매물의 가격 거품이 조금씩 빠지면서 본격적으로 M&A 논의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시너지 효과 높이는 데 주력해야=보안업계에 M&A 붐이 불 것이라는 예상은 시기상조지만 작년에 비해서는 확실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따라서 조건이 맞는다면 내년 초에는 몇몇 M&A이 가시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재근 이니텍 사장은 “M&A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라며 “가격은 수익성이나 문화적 차이, 잠재력 등 모든 조건을 하나로 압축하는 기준”이라고 평가했다. 많이 현실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자사가치를 계량화하지 못하는 게 국내 보안 업계의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단순 자금조달을 위한 M&A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비용부담과 후유증이 높은 부실기업 인수보다는 기업별로 경쟁력 있는 부문을 살릴 수 있는 ‘사업부문별 트레이드’ 방식이 M&A의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보안업계 한 관계자는 “해외 주요 보안 업체들은 기술력을 갖춘 전문 업체를 무더기 인수해 글로벌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며 “국내 기업들도 경쟁력이 약한 부문을 분리하고 분야별로 대표 주자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야 장기적인 희망이 있다”고 밝혔다.
<장동준기자 dj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