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혈경쟁 만연 시장 질서 흔들
지난 8월 13일 오후 코엑스 콘퍼런스 룸. 도메인 업체인 H사의 한글.kr 등록 시행에 따른 기업의 도메인 마케팅 전략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참석자 중 몇명이 H사와 관계사의 신규 서비스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하더니 마침내 “xxx는 물러가라” “더 이상 기만하지 말라”는 원색적인 문구로 행사에 찬물을 끼얹었다. H사의 한 관계자는 “과거 유사한 서비스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준비한 것 같다”며 “아마도 이 뒤에는 모 업체가 있을 것”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또 다른 도메인 업체 N사는 요즘 자사의 서비스가 다른 곳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고 보고 있다. N사의 게시판에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상호 비방과 근거없는 우격다짐이 난무한다. “우리 서비스를 겨냥한 조직적인 방해 움직임이 감지된다”며 “어디서 어떤 문제를 걸고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 회사 관계자의 말이다.
도메인 업계 내부의 경쟁사간 갈등이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다. 다른 회사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을 쉽게 퍼뜨리는가 하면 경쟁사의 임원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온다. 동종 업계에 몸담고 있는 업체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예의나 기본적인 신뢰는 사라진지 오래다. 무슨 사안이 생기면 대화로 풀기보다는 소송이나 실력행사가 먼저 앞선다. 도메인 업계에서 내용증명을 발송하고 시정공문이 오가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될 정도다.
가비아와 후이즈는 지난 6월 후이즈가 가비아를 상대로 제기한 부정경쟁행위에 관한 고소건으로 으르렁대고 있다. 현재 검찰로 넘어간 이 사건은 가비아가 소유한 ‘www.whois.or.kr’ 사이트가 실수를 가장한 고의적인 마케팅으로 후이즈가 운영하고 있는 ‘www.whois.co.kr’의 사업에 심각한 사용자 혼선을 초래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 주변 업계의 반응이다.
국가공인 도메인 운영기관인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와 한글인터넷주소 사업자인 넷피아의 대립도 가관이다. 공인 서비스와 사설 서비스라는 점에서 충분히 협력해 시장의 파이를 키워나갈 수 있지만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 KRNIC과 넷피아는 서로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상호 비난한다. 넷피아는 KRNIC이 벤처기업인 자사 서비스를 무력화시키려한다고 주장하고, KRNIC은 넷피아의 사설 서비스가 꼼수를 쓰고 있으며 오히려 근거없는 소문으로 센터의 위상에 흠집을 내고 있다고 맞받아친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풀기위해 서로 협의 테이블을 가져보는게 어떠냐는 의견에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며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더욱이 8월 이후 한글.kr 서비스와 키워드형 확장 도메인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이를 둘러싼 갈등은 더욱 증폭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존 도메인 시장이 포화상태에 있는데 반해 새로운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신규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더욱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플러그인 프로그램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면서 다른 서비스를 간섭하거나 특허권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도메인 업계의 이같은 이전투구는 무엇보다 도메인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업체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도메인업에 종사하고 있는 업체수는 공인 등록대행업체와 리셀러를 비롯해 총 100여개로 추산된다. 닷컴 열풍이 일던 2000년 200여개에서 크게 줄어든 것이기는 하지만 연간 도메인 시장규모 300억원에 비하면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개 업체가 3억원씩 벌어들이는 셈.
그러나 이 가운데 평균 절반 이상은 상위운영기관인 베리사인과 KRNIC이 가져간다고 가정할 경우 150억원을 나머지 업체들이 나눠먹는 것이다. 물론 호스팅과 쇼핑몰 등 다른 사업을 병행하긴 하지만 모든 인터넷 사업의 기본이 되는 도메인 시장은 절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도메인 업체들이 수요확대를 위해 저가 출혈경쟁에만 의존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시장질서가 크게 흐려지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35달러 수준인 외국의 도메인 가격에 비해 우리나라의 도메인 등록비는 사실상 지나치게 낮은 편”이라며 “이같은 저가경쟁이 결과적으로 업계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으며 업체간 갈등도 더욱 첨예해지게 됐다”고 개탄했다. 만약 업계가 공동으로 도메인의 가치를 높이는데 노력하고 서비스경쟁을 벌였다면 이 같은 심각한 이전투구는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도메인 전문가들은 “업계의 이 같은 갈등구조는 결국 서비스에 대한 사용자 불신과 혼란만 초래한다”며 “업계가 공동으로 시장을 키운다는 인식을 하지 않으면 신규, 확장 도메인 서비스에서도 기대와는 달리 사용자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