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울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중에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꺽꺼억,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최소한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비평작업을 무시하고, 내가 본 최고의 한국 다큐멘터리영화 ‘영매’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자 한다. 박기복 감독이 3년 동안 전남 진도의 씻김굿에서 인천의 황해도 굿까지 온갖 굿판을 돌며 전국의 무당들을 만나 촬영한 이 소중한 보고서는 우리를 삶의 본질적 질문과 마주치게 한다.

 우리는 삶 혹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늘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살면서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무엇인가. 이런 철학적 질문들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거리에서 고뇌하던 현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진도의 산등성이에서 밭일하는 아낙네의 깊게 패인 주름에서, 이제는 중풍 맞아 다시 굿판에 서지 못하는 늙은 무당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런 질문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의 위력은 우리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삶의 가장 근원적 질문들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데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어주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나게 하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가 무당이다. 제정일치 시대의 무당은 한 사회의 우두머리였고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들은 신의 언어로 지상을 통치했으며 생로병사, 삶의 이치를 분별력 있게 헤아려 대중들을 다스렸다.

 그러나 지금 무당은 천대받는 직업의 하나다.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든 무당이라 해도 하대체로 대한다. 자신들의 은밀한 비밀과 소통하는 영험한 그들을 일부러 경원시한다. ‘영매’는 굿판을 벌이는 무당들의 외형적 삶이 아니라 그들의 사적인 삶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서 애환을 짚어낸다. 무당의 몸을 숙주 삼아 활동하는 죽은 자들의 은밀한 욕망 혹은 맺혀 있는 한을 드러낸다.

 무당이 하는 일은 지상의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못다한 말을 전하는 죽은 자들의 대리인 역할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당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자들끼리의 화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황해도 강신무·박미정 모녀는 서로 모시고 있는 신이 달라 오랫동안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살아서 화해하는 게 더 쉬워요.”

 박미정은 살풀이굿을 펼치며 접신상태에서 의뢰인의 집안에 상이 난다고 말한다. 강습무인 그녀는 비오는 날 날이 시퍼런 작두날에 올라서 신의 말을 대신 전했지만 의뢰인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한 달 후 그녀의 큰아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다시 박미정은 죽은 사람의 원혼을 달래주는 진오귀굿을 하면서 혼령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살아있는 자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게 한다.

 진도 씻김굿의 세습무 채씨 자매 중 언니 채둔굴은 ‘영매’ 촬영 도중 세상을 떠났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동생 채정례가 언니의 씻김굿을 하는 것이다. 진도 최고의 무당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네 자매는 모두 무당이 됐지만 이제 남은 사람은 채정례뿐이다. 자식들에게 무업을 물려주는 세습무이지만 그녀는 천대받는 무당이 싫어서 자식들을 모두 서울로 올려보냈다. “나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한 번 이쁘게 생겨가지고 소리하는 사람, 일등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늙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영매’는 위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면서 감독의 세밀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양한 카메라 각도로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다큐멘터리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자연풍경의 인서트 샷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자연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확대한다. 죽음의 의식을 집행하는 그들의 화려한 외형적 동작에만 초점을 맞추지도 않았고, 그녀들만의 한맺힌 내적 독백에만 귀기울이지도 않았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외적 행위와 내적 정서를 연결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 질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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