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기술직 공무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고 싶다.”
한국행정학회 이종수 회장이 얼마 전 도청의 조직을 진단하면서 기술직 출신의 한 과장으로부터 들은 충격적인 얘기다.
현재 지방 도청에는 기술직이 차지할 수 있는 국장 자리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9급 행정직이, 대학원까지 마치고 7급 공무원으로 출발한 기술직 공무원의 상관으로 앉는 일이 허다하다.
지방이 이 정도라면 중앙부처는 쉽게 상상이 간다. ‘기술직’이란 꼬리표를 달고 공직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갈 자리는 지극히 제한된다. 기술직만 갈 수 있는 전문직이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기술-행정 복수직은 대개 행정직의 몫이다.
실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상정된 이공계 공직진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기술직 단수, 기술직 복수, 행정-기술 복수 등 기술직 보직이 가능한 정원 중 실제 기술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85% 수준. 그러나 대부분 5급 이하일 뿐 4급은 66.3%, 3급 50.3%, 2급 32.4%에 불과하다.
더욱이 행자부·재경부·국조실·기획예산처·감사원 등 소위 핵심부처는 그야말로 기술직 볼모지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 이들 부처의 경우 정책결정을 좌지우지하는 4급 이상 중 기술직 TO 자체가 거의 없다. 기술직의 진입창구인 복수직위는 찾기 힘들다. 행자부 출신의 한 고위당국자는 “일부 기술부처를 제외하고는 각 정부부처들이 기술직이나 복수직 확보에 아주 인색한데다 확보했다 하더라도 행정직 자리로 간주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있다”고 말했다.
업무 특성상 기술직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산업관련 부처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전문연구직의 비중이 높은 건교·농림·환경·복지·해수부 등과 집행부처인 식약청·특허청·중기청 등 외청들만 기술직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뿐 대부분의 중앙부처는 50%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고위직으로 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기술직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부처도 기획·총무·예산 등 핵심부서의 기관장은 대부분 행정직이다.
심지어 산업 주무부처를 자처하는 산자부의 기술직 비중도 33.8%에 불과하다. 연세대 조원철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는 “갈수록 전문성에 기초를 둔 국가 운영이 요구되지만, 산업 주무부처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산자·정통부가 국장급 중 기술직이 단 1명일 정도로 취약한 행정구조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현상은 7급이든 5급이든 공무원으로 첫받을 내디딜 때부터 행정직과 기술적으로 나뉘어 시작하다 일정 직급으로 올라가는 순간 기술직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 가령 이공계에서 각광받는 전공을 수료한 유능한 인재라도 일정 직급에 오르면 갈 수 있는 보직은 한정된다.
특채 출신으로 중앙부처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기술직이란 한계에 부딪혀 은퇴한 전직 고위 공직자의 말을 들어보자. “행시를 패스해 행정직으로 입문하면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를 따지지 않지만, 기술직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노비문서가 됩니다. 마치 인디언은 아무리 유능해도 보호구역을 벗어날 수 없고 대신 국가에서 생활비를 보조하는 ‘인디언 보호구역’과 같은 셈이죠.”
따라서 공직사회의 이공계 진출을 확대하려면 무엇보다 행정-기술직으로 구분된 직급을 관리자격인 4급부터라도 통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기술직’ 꼬리표를 떼어야 한다는 것. 최근 중앙부처 정책실장(1급)을 맡다가 사표를 낸 A씨는 “기술직(특채)으로 공직에 입문, 행정직들과 경쟁하며 적지않은 벽을 느꼈다. 공직에 입문하면 학연·지연에다 ‘고연’(고시)까지 들먹이며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데, 이런 점에서 기술직의 한계가 많다”고 토로했다.
현재 행시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기술고시 채용 인원수를 행시 수준으로 맞춰 양적 격차를 줄이는 것도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궁극적으로는 두 고시를 하나로 통합, 불평등을 해소하고 전문성과 행정능력을 겸비한 유능한 민간전문가나 이공계 연구원을 특채로 채용할 수 있는 문호를 열어야 한다.
기술직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현직 고위 공무원인 C씨는 “공직사회에선 기술직은 사고가 편협하고 행정능력이 떨진다는 편견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육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이공계 출신들은 ‘스페셜리스트’로서 일반적인 교육을 받는다면 행정직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공계 공직확대 문제는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어쩔 수 없이 행정직들의 저항이 불가피한 만큼 공직사회 전반의 동요를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공계의 문호를 열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행정수반인 대통령이 강한 실천의지를 오래도록 보여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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