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여성벤처협회장 이영남(3)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1986년 우리나라 산업계가 전국적인 노사분규로 멍들고 있었던 그 무렵 나의 전 직장인 광덕물산은 3개의 사업부 분사를 추진 중이었다. 항상 내게 장사꾼 기질을 지녔다는 말씀을 하셨던 회장님께서 전자사업부를 맡아보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당시 나는 유통업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산업용계측기를 무엇을 기대하고 해보라고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겠다고는 했지만 이미 마음 속엔 또 다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성들도 꺼릴 만큼 계측기사업은 기술기반, 브랜드 등 무척이나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전해 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어찌보면 당돌할 수도 있는 아집이었지만 나는 전자산업 부문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광덕물산의 조 회장님은 물망에 오른 몇 명의 후보 중 나를 최종적으로 선택하셨다. 그 동안 기대 이상이었던 나의 사업수완에 대한 회장님의 믿음이 무엇보다 큰 결정 요인이었지만 남편이 엔지니어라는 점과 시어머님의 지원도 큰 도움이 됐다.

 광덕물산의 전자사업부를 모태로 한 서현전자는 이렇게 탄생했다. 내 나이 31세였던 88년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얼마 안됐지만 공장이라는 큰 식구가 언제나 우선이었다. 일주일이면 닷새는 꼬박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수출물량을 맞추느라 철야를 했다. 하지만 지금도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에 컨테이너 차량에 실려가는 물건들이 해외의 고객들에게 간다는 뿌듯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겁없이 도전한 생산업체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움이 많았다. 창업초기 5년간 주 생산품은 산업용계측기로 이른바 이름없이 기술만을 파는 주문자상표생산(OEM) 방식이었다. 아무리 일을 하고 기술을 개발해도 결코 OEM으로는 큰 성장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해외바이어 발굴에 나섰다.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에게 처음 회사를 소개하고 제품을 알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해외바이어들의 문의를 받으면서 나는 더욱 힘을 받아갔다. 한두 건씩 거래가 늘어나면서 그들과의 신뢰가 쌓여갔다.

 그 무렵 , 모체인 광덕물산이 부도가 났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위 연쇄부도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동안 거래해온 해외 바이어들에게 물건은 나중에 보낼 테니 제품값을 먼저 보내주면 안되겠냐는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생각보다 많은 거래처에서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나는 오히려 뜻하지 않은 환차익까지 보게 됐고 공장을 넓혀 사세까지 확장하게 됐다. 그 동안 쌓아온 신뢰가 위기를 기회로 바꿔주었다. 전문 지식이 부족하면 나의 신뢰를 더 팔면 되고 인맥의 한계를 느끼면 정성을 보태면 된다. 중요한 것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신뢰를 지켜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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