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 R&D 시스템 "이젠 뜯어 고쳐야"

제2과학기술입국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리나라 국책 연구개발(R&D)시스템을 전면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70년대 출연연구기관 체제가 자리를 잡고 80년대 정부 R&D사업이 형성되면서 우리나라 국책 R&D사업은 그동안 양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국책 R&D시스템은 곳곳에서 양적 성장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특히 지난 99년 과학기술 및 국가혁신체계의 핵심 축을 담당하는 정부출연연에 대한 연구회 제도를 도입, 21세기에 지식기반사회에 맞는 국가R&D시스템 개혁을 모색했으나 이마저도 현재 운영상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근본 원인은=현재 국가 R&D시스템은 정책의 주체인 각 정부부처가 추진하는 사업과 실행주체인 출연연이 기획예산처로부터 출연금을 직접 받아 기업과 대학을 연계해 추진하는 기관고유사업으로 양분된다.

 그러나 지난 96년 국가 R&D의 경쟁성 도입을 통한 연구효율 제고란 명분아래 충분한 사전검토와 제도적 보완장치도 없이 목적기반사업(PBS) 제도가 전격 도입된 이후 국가 R&D 추진체계상의 허점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상황이다.

 PBS의 도입과 IMF 경제위기 이후 출연연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출연연을 비롯한 국내 과학기술계는 ‘적자생존’이란 기업식 경쟁논리가 여과없이 적용, 정부와 출연연 등 R&D 실행주체 사이의 불신이 골이 깊어진 것이다.

 특히 PBS에 의한 출연연 비용부담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돼 부득이하게 출연연간, 심지어 연구기관 내부팀간에까지 연구과제 수주를 위한 과당경쟁이 확산됐으며 부처 R&D비중이 급증하면서 부처간의 주도권 다툼도 날로 심화되는 양상이다.

 ◇어느 정도 심각한가=과기부·산자부·정통부 등 국가 R&D를 주도하는 세 부처는 최근 ‘차세대 성장엔진 발굴 프로젝트’를 놓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미래 우리경제의 먹거리를 찾는 이 사업의 헤게모니를 서로 잡겠다고 나선 것. 이에 따라 청와대까지 사전조정에 나선 상황이다.

 출연연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연구활동에 매진해야 할 연구원들이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과제수주에 상당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기관의 성격이나 방향성까지 무시하며 프로젝트 수주에 혈안이다.

 문제는 이같은 과당경쟁이 각 연구주체는 물론 국책연구사업 자체의 부실화할 초래할 수 있다는 것. 산업기술연구회(이사장 박원훈) 주최로 지난 5일 열린 ‘국책R&D체제의 새로운 추진방안 모색 세미나’에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김계수 박사는 “출연연들이 부족한 인건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처 R&D에 치중, 기관고유사업은 부처 R&D과제 수행 후 여유인력을 동원해 결국 두 사업 모두 부실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부처마다 실용화 및 기초원천기술 개발사업을 경쟁적으로 추진, 신산업기술 정책의 책임주체가 모호해지는 것도 문제다. 특히 IT·BT·NT 등 부처 혼합성격의 R&D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각 부처들은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이란 지적이다.

 ◇대안은 없나=무엇보다 부처별 경쟁체제로 이루어진 국책 R&D시스템을 실행주체인 출연연을 관리감독하는 연구회 주도의 ‘범부처적 공동전략기획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범부처 성격의 연구회 기획역량을 강화, 기술의 융합시대에 대응하고 각 R&D주체간의 과당경쟁을 제도적으로 보완하자는 의미다.

 이를 위해 정부부처 소관 R&D예산의 거래방식을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즉 부처별 R&D 과제 중 공동 전략연구가 필요한 자금을 연구회를 통해 ‘패키지’ 형태로 지원하는 ‘FCI(Full Cost Investment)’제도를 도입하자는 것. 산업기술연구회의 관계자는 FCI제도가 정착되면 PBS의 허점이 상쇄되고, 보다 효율적인 R&D체계 정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1세기형 국책R&D체제에 맞는 연구인력의 ‘역동적 동원체제’ 구축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STEPI 김계수 박사는 “기존의 피라미드식 조직을 ‘아메바형’의 유연한 수평조직 형태로 전환하고 나아가 연구원 무정년제도, 유연한 퇴출제도, 대학교수의 출연연 요원화 등을 검토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지금의 국가 R&D시스템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전제하며 “새 정권 초기에 시스템 전반에 ‘메스’를 대지 않으면 근본적인 처방은 또다시 임시방편에 그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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