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줄거리:세계적인 통신회사 JTT의 스타 매니저 후지사와 아키라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도쿄대 동기생 다나카 에이지는 자살의 내력을 밝히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아키라가 태어난 효고현 아시야시청 직원인 혼다 지카라라는 인물이 아키라의 중학교 후배라는데….
1999년 6월 11일
고베역 앞 술집
위를 향하고 걷자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아 그리운 그 봄의 밤
외톨이었던 그 밤…
우에오 무이테(위를 향하고)의 한 소절도 채 끝나지 않은 채 지카라는 가라오케 무대에서 자리로 돌아와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일본인의 애창곡이 된 이 평범한 노래에 왜 사람들이 이렇게 센티해지는지 에이지는 이해가 안간다.
아키라와 그의 모친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니시구치 다다오라는 자에 관하여 지카라가 무언가 알고 있는 낌새를 챈 에이지와 히로코는 도쿄에서 하루를 푹 쉬고 아시야로 내려와 지카라에게 시간을 내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결국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같이 먹고 내친 김에 고베로 나와 술을 하게 된 것이다.
“아니, 지카라상 왜 그래?” 저녁을 먹으며 좀 친밀감을 느끼게 된 에이지가 오래된 친구인 듯한 말투로 물어본다. 지카라는 아무말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만 훔쳐내는데 손수건이 꼬깃꼬깃한 게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퉁퉁한 얼굴에 안경이 작아 안경테를 얼굴 살이 웅켜 쥐고 있는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행색도 초라하다. 싸구려 넥타이에는 음식물 파편이며 국물기름이 장식되어 있다. 그래도 순해 보이는 얼굴이다. 아키라의 중학교 후배라 하였으니 50이 아직 될까말까. 전에 시청에서는 휠체어에 앉아 있더니 오늘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어떻게 한쪽 다리를 잃었을까.
“우에오 무이테 노래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보지요? 옛날 애인 생각?”하며 애교 있게 히로코가 묻는다.
그 말에 “아녜요”하며 지카라는 비로소 얼굴을 들고 피식 웃는다. 미즈와리 (위스키에 물 탄 것)를 한 모금 마신 후 들릴 듯 말 듯 한 말로 내뱉는다. “저 사실은 죽은 니시구치 다다오를 잘 압니다.”
“네?”하고 합창하듯 에이지와 히로코가 놀랜다.
“돌아가신 아키라상과 우린 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지요.” 마치 비행청소년이 부모 앞에 잘못을 고백하듯이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후지사와 아키라, 니시구치 다다오 그리고 혼다 지카라 셋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뿐만 아니라 다다오와 지카라의 부모는 모두 아키라 부친의 그늘 아래서 살았다. 다다오의 부친은 아키라의 부친이 소유하는 파칭코를 하나 관리하고 있었고 지카라는 편모 슬하에 있었는데 그녀 또한 아키라의 부친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카운터도 보고 청소도 하곤 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오야붕인 아키라의 부친을 두려움과 경외로 대하고 있었는데 아키라의 모친은 이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가족같이 대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어 부탁을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아키라도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이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형제처럼 대했다. 아키라의 모친이 그들이 모두 존경하는 성녀와 같은 존재였다면 공부 잘하고 잘 생긴 아키라는 그들의 자랑이었던 것이다. 특히 주먹이 세고 잔인한 다다오는 아키라의 보디가드 같은 존재였다. 아키라가 고베를 떠나 도쿄로 갈 무렵 이들은 이 우에오 무이테를 같이 부르며 우정을 나누곤 하였다. 입장은 다르지만 셋 다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터다. 결국 모두 하층민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니시구치 다다오상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에이지가 묻는다.
“글쎄요…. 수년 전에 그러니까 94년에 한국 부산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어요. 이를테면 행방불명이지요. 그렇지만 죽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허….” 에이지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시 길이 막힌 느낌이다. 이러한 에이지의 심중을 읽기라도 하듯 지카라가 내뱉는다.
“아마 아키라 형님이 그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배신이라니?”
“글쎄요.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는 건데…. 앞으로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요….”
셋은 눈앞의 탁자로 관심이 돌아온 듯 술잔들은 채워 한잔씩 마신다.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분위기가 바뀐 것을 이용해서 에이지가 묻는다.
“혹시 요코다 도시오라는 인물을 아십니까?”
이 말에 지카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론이지요”하고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두 잔을 연거푸 마신다. “우리가 같이 없애버렸으니까요.”
“우리라니요?”
“다다오 형님과 우리 애들이지요.”
“그러면…?”
“네, 저도 야쿠자 출신이에요. 요코다 그 새끼는 지금 생각해도 잘 죽였습니다…. 저는 나중에 극도에서 발을 씻고 오야붕의 주선으로 시청에 촉탁직원으로 들어간 겁니다.”
영 믿기지 않는 이 말에 에이지와 히로코는 어안이 벙벙하다. 뜸을 들이다 에이지가 묻는다.
“요코다 도시오에 대하여 아시는 대로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지카라는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듯 한동안 말이 없이 담배만 피우다 홀연히 내 뱉는다.
“아키라 형님이 다다오 형님을 찾아온 것이 73년 봄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구미(組)에서 다다오 형님 밑에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지카라의 회고는 계속된다.
아키라가 다다오를 찾아 와 부탁한 이야기는 간단한 것이었다. 전전공사에 입사하기 위한 신원조사에서 아키라의 조상이 조선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아키라의 부친이 전국 최고 폭력조직 야마이치 구미의 고베조장이었다는 것을 전전공사가 알게 되었다. 아들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 일본에서 출세하기를 바랐던 부친은 당시 인사부장 이하 중요 인물들에 거금의 뇌물을 주고 입을 막았다. 물론 비밀을 발설할 경우에는 생명을 잃을 것이라는 주의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인사계장이던 요코다 도시오라는 놈이 모친인 사다오에게 모종의 접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가 없고 뭔가 아주 예감이 안 좋으니 요코다에게 대하여 자세히 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부탁을 받은 다다오는 지카라에게 즉시 행동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당시 둘은 아키라에게서 처음으로 부탁을 받았다는 기쁨과 그들이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사다오 아주머니에 관한 것이라 아주 각별히 신경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지카라는 즉시 야마이치 구미의 도쿄지부 조원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수일 내에 온 보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요코다 도시오. 1934년생(39세). 전전공사 인사과장. 후쿠이현 출신. 가족은 처와 1녀. 가정생활이 원만한 편은 아니고 외도가 심함. 사내에 평판은 좋지 않으나 상사에게 잘 보여 비교적 빠르게 과장으로 진급. 최근 2, 3년 전부터 오사카, 고베 등지로의 여행이 잦음. 후지사와 사다코상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미행 등 좀 더 철저한 조사가 필요.
이 보고를 놓고 다다오와 지카라는 즉시 미행명령을 내렸다. 물론 오야붕인 후지사와 데츠로에게는 비밀이었다. 오야붕의 허가 없이 미행 등을 지시하는 것은 구미의 행동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오야붕 본인의 부인에 관한 것이어서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 2개월 후 다시 미행조로부터 보고가 왔다. 해당기간에 요코다가 사다코상을 오사카의 호텔에서 1회, 고베의 호텔에서 2회 밀회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에 지카라와 다다오는 피가 끓어 오름을 느꼈다.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존경하고 그리워하던 인물이 아닌가. 다만 예단을 하지 않고 직접 확인하기로 하였다. 지카라가 직접 실수 없이 처리하라는 다다오의 명령이었다. 당시 지카라는 아직 다리가 멀쩡한 청년이었다.
1973년 9월 어느 토요일 아침 도쿄의 조원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요코다가 방금 도쿄역에서 고베로 향하는 신칸센에 탔다는 것이다. 역원에 의하면 고베 도착시간은 12시 14분. 전화를 받은 시각이 10시가 채 안되므로 시간이 있었다. 요코다가 사다코상을 밀회하던 고베 역전의 고급호텔에 부하들을 즉시 파견한다. 지배인에게 말하여 요코다가 들어오면 사전에 도청기를 설치한 방을 줄 것이며 옆 방을 비워놓으라는 지시와 함께.
지카라가 고베 역전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마칠 즈음 부하가 들어온다. 요코다와 사다코상이 호텔에 막 체크인하였으며 옆방인 1216호 실에 도청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묘한 사안이라 지카라는 부하들을 보내고 홀로 1216호 실로 들어가 도청하기로 한다. 1216호로 들어가는 지카라의 마음은 분노, 호기심 그리고 이상한 성욕이 뒤엉킨 복잡한 심경이었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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