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왜곡된 `e메일 신화`

◆홍윤선 웹스테이지 사장 yshong@ozmailer.com

 신화는 종종 과학과 이성을 압도한다. 특히 신화가 사회의 전체 또는 한 영역에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할 때 그렇다. 인터넷은 문화다. 유기체와 같은 상호작용이 그 본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e메일은 인터넷의 근간이자 핵심이다. 이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의식과 행동에도 일련의 무의식적인 흐름이 있다.

 e메일은 21세기에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정작 이를 활용하는 태도에선 세련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내는 역할로서는 수준 이하의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e메일을 사업의 도구로 이용하는 편에선 자신의 메시지를 될수록 많이 전달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공격(?)한다. 반면에 수신자 입장에 있는 네티즌이나 메일서비스회사는 무차별적인 공격으로부터 회사와 고객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입장이 다른 당사자간에 전쟁 틈바구니 속에서 평범한 사업자와 네티즌들이 피해를 입는다.

 e메일 환경이 지금과 같이 무질서한 상황으로 발전하기까지 몇 가지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첫번째는 대중매체로 인한 ‘미디어 인식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메일은 매우 개인적인 매체다. 인터넷 초창기에 어느 유명 외국 칼럼니스트가 이 메일을 이용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메시지는 간결하게 전달하라’ ‘답장은 하루 이내에 하라’ ‘반드시 개별적인 안부 인사를 하라’ 등이었다. 주로 개인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해당하는 조언이지만 여기에는 e메일이 갖는 개별적인 특성이 잘 포착되어 있다. 인터넷을 광고나 홍보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가장 많은 실수가 이를 마치 방송매체와 같이 취급하는 태도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관성이 몸에 배어 있는 탓이다.

 두번째는 ‘그릇된 규모의식’이다. 많은 것, 큰 것에 대한 자기만족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실효성의 문제는 충분히 의심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눈 앞의 규모가 주는 기대감에 이끌린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태도와 한번에 가능한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습에는 규모에 대한 자기만족이 드러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방적인 메시지는 더 이상 어떠한 흡인력도 없다.

 세번째 이유는 ‘단절적인 의사소통 관행’이다. e메일이 개인적인 매체라는 뜻은 상대방이 인격체라는 말과 동의어다. 일방적 의사소통은 관계를 단절시킨다. 들을 의사가 없는 일방적 전달은 결코 대화로 발전할 수 없으며 생산적 효과도 나타날 리 만무하다. 마지막으로 ‘비용 메커니즘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공간은 결코 무료가 아니다. 무질서의 대가는 생각보다 비싸다. 스팸메일로 인한 메일업체의 서버나 네트워크와 같은 준사회적 자산의 손실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5월에 시행예정인 스팸메일 규제법안의 내용을 보더라도 ‘e메일 취득경로를 명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웹사이트로 이동하지 않고 ‘즉시 수신거부처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장이 무질서할수록 규제가 강화되고 투명성과 질서를 세워나가는 방향으로 규제가 발전한다. 무질서한 메일에 편승할수록 e메일을 보낼 수 있는 대상시장이 좁아진다는 뜻이다.

 정부의 규제나 e메일 사업자의 자구책을 들여다보면 시장에서 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투명성’이다. 정책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지금껏 반복되고 있는 e메일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투명성은 기본적인 요소다. 그 바탕 위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e메일은 전달이 아닌 대화다. 물론 이를 위해선 새로운 관점의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접목시킨 많은 서비스 수단이 필요하다. 그 동안 대량으로 수집하고 대량으로 발송하는 것만을 최고의 기술로 여기던 오해에서 벗어나 전달이 아닌 대화를 시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기술과 서비스가 속히 등장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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