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6월 어느 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편의 비디오 테이프를 건네받았다. 삼성전자 세탁기 생산공장의 모습을 회사가 ‘몰래’ 찍은 테이프였다. 요즘은 보편화돼 버린 몰래카메라의 원조인 셈이다. 내용은 생산라인에서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의 플라스틱 부품이 규격에 맞지 않자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는 대신 칼로 깎아내 조립하는 모습이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다.
테이프를 본 이건희 회장은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불량품을 수리하는 회사가 무슨 경쟁력이 있는가”며 불벼락을 내렸다.
당장 세탁기 생산라인 가동이 중단됐다. 당시 삼성은 ‘처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획기적인 신경영방침으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이 회장 자신도 직접 일본·미국·독일 등 세계를 돌며 강연과 세미나를 강행하고 있었다. 대충대충이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중차대한 시점이었다. 공장가동을 중단하거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원인을 규명해 불량률을 선진기업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후 삼성전자의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 생산라인에 ‘라인스톱제’가 도입됐다. 불량품이 발생하면 즉시 라인을 세워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다시 가동하는 제도다. 덕분에 불량률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생산라인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10년 전에는 이처럼 불량률을 줄여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소비자 만족도 향상의 정석이었다. 소비자의 지식이나 의식 수준이 현재에 이르지 못했을 때 얘기다. 지금은 다르다. 이미 품질은 대부분 가전업체들의 기본 사항이 됐다.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하려면 또다른 무언가, 다시 말해 획기적인 마케팅 포인트가 있어야 했다. 기업들은 그 포인트를 손으로 만지는 ‘제품’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으면서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로 삼았다.
그래서 요즘 신제품 출시 후 소비자들이 직접 사용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토록 한다거나 사용 후 리포트를 제출하는 고객에게 파격적인 할인혜택을 주는 마케팅 기법이 유행이다. 고객DB를 활용해 소비자가 부르기 전에 먼저 찾아가 불편한 사항은 없는지,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미리 살피는 적극적인 마케팅도 흔해졌다. 잠재고객을 미래의 실질고객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투자라는 점을 기업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증거다.
점점 까다로워지는 소비자와 그 입맛을 맞추려는 기업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 기업의 수준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소비자가 있기에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소비자가 왕이며, 소비자가 바로 스승이다.
<전경원기자 kwjun@etnews.co.kr>
많이 본 뉴스
-
1
모토로라 중저가폰 또 나온다…올해만 4종 출시
-
2
단독개인사업자 'CEO보험' 가입 못한다…생보사, 줄줄이 판매중지
-
3
LG엔솔, 차세대 원통형 연구 '46셀 개발팀'으로 명명
-
4
역대급 흡입력 가진 블랙홀 발견됐다... “이론한계보다 40배 빨라”
-
5
LG유플러스, 홍범식 CEO 선임
-
6
5년 전 업비트서 580억 암호화폐 탈취…경찰 “북한 해킹조직 소행”
-
7
반도체 장비 매출 1위 두고 ASML vs 어플라이드 격돌
-
8
페루 700년 전 어린이 76명 매장… “밭 비옥하게 하려고”
-
9
127큐비트 IBM 양자컴퓨터, 연세대서 국내 첫 가동
-
10
'슈퍼컴퓨터 톱500' 한국 보유수 기준 8위, 성능 10위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