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철학의 빈곤

◆원철린 IT산업부장 crwon@etnews.co.kr

 

 22일은 정보통신의 날이다. 48돌을 맞은 이날 정보통신인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IMF를 극복한 일등공신으로 정보통신인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초고속 정보인프라 환경을 구축했다.

 이동통신 이용자가 3000만명을 넘어섰으며, 특히 불과 5년 만에 초고속인터넷 이용자가 1000만명을 돌파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IT제조업면에서도 보면 생산에서 세계 4위, 수출에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통계와는 다르다. IT산업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후발 통신사업자는 연달아 쓰러지고 있다. 이미 두루넷이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온세통신마저 법정관리를 신청중이다. 정보통신업계가 초유의 구조조정에 직면해 있다.

 한때 차세대 서비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IMT2000도 예전과 같지 않다. 사업자들은 제3세대 이동통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투자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여기에 경기침체마저 겹치면서 장비업체들과 이동통신단말기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체적인 난국이어서 정보통신인들이 축전의 날을 즐길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IT만큼은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찼으나 이젠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 넘길 수 있을지 한숨만 쉬는 상황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 뒷짐을 지고 있는 정통부에 대해 최근 국회 과기정 상임위원장직을 사임한 김형오 의원은 “정통부가 철학이 없다”고 지적한다. “산업육성도 좋지만 정통부만의 업무인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비전과 철학의 제시가 한마디도 없는 것이 아쉽다”면서 “좀더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질타한다.

 김 의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금 정통부는 철학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중심에는 진대제 장관이 서 있다. 진 장관은 취임한 이래로 정통부의 고유업무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 적이 없다. 삼성에서 경험한 일등주의를 부르짖으면서 미시적인 산업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낼 뿐이다. 이러한 진 장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전의 성장중심의 논리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더구나 현실을 보는 진 장관의 인식에 문제가 없지 않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업체를 보듬기보다는 벤처업체들의 경쟁력 약화를 그들 자신에 돌리고 있다. 오직 생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벤처업체들에 구조조정에 나서라고 질타하는 모습은 진 장관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대기업의 CEO로서의 위치인지, 아니면 한 나라의 정보통신 정책을 책임지는 장관의 위치인지 구분을 할 수 없다.

 지금 진 장관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시적인 정책보다는 거시적인 정책을,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조정자의 역할이다.

 더구나 진 장관이 강조하는 일등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혼란스러운 통신사업에 대한 가닥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국가의 기간산업인 통신사업을 시장 자율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위험이 크다. 욕을 먹더라도 진 장관이 앞장서서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48돌을 맞은 정보통신의 날,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들을 원점에서 되돌아보고 반성과 아울러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비전과 철학이 요구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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