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실명인증과정이 필요합니다. 주민등록번호와 글을 쓰시려는 분의 실명을 입력하십시오.’
‘인증에 필요한 정보가 등록되어있지 않습니다.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로 정보를 등록하여 주세요.’
정통부가 최근 정통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입한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의 현황이다. 지난달 정통부의 청와대 업무보고를 통해 더욱 그 실체가 분명해진 이 게시판 실명제는 프라이버시 및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을 이유로 시민사회단체와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임업체 등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급기야 반대진영의 선봉에 선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실명확인용 DB 제공 및 이용이 불법이라며 정통부와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및 한국신용평가정보를 15일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정통부가 추진하려는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의 쟁점과 대안은 무엇인지 긴급진단한다.
◇현황과 쟁점
정통부는 지난달 28일 청와대 업무보고를 통해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를 전 정부부처와 민간 사이트에까지 확대적용할 뜻을 밝혔다. 익명성을 악용한 유언비어 배포와 사이버 명예훼손 등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것.
정통부는 급속한 정보 확산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상 이같은 명예훼손 등에 사후대응이 어렵고 사회적 비용도 막대하다는 점을 들어 실명제를 통해 이같은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따라 우선 공공기관 인터넷 게시판의 실명화를 추진한 다음 민간 분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으로 공청회 등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 다음 실효성 제고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설 방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발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우선 정부와 일부 인터넷 업체들이 사용자들의 ID 등록 및 상품 구입 과정에서 실명확인용으로 사용되는 DB를 문제삼고 있다. 이들 DB의 실명확인 이용은 원래의 구축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개인정보 즉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은우 변호사는 “은행이나 통신서비스업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정보 DB는 게시판 실명확인용으로 이용하도록 동의된 것이 아니다”라며 “이 DB를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에 적용하는 것은 확대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신용사업팀 관계자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지 아닌지 가부만 확인해주는 것으로 사용자가 직접 실명여부를 인증받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지만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이미 협회와 한국신용평가정보는 물론 정통부까지 고발조치했다.
개인정보의 누출 위험이 크다는 것도 반대이유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은 지난달 31일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익명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현행법상에서도 추적 및 처벌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참여연대도 게시판이 실명화되면 운영자에게 DB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개인정보 누출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업계의 반발도 적지 않다. 다음커뮤니케이션도 “이미 포털사들에서는 금융거래, 유료콘텐츠 이용, 상품 구입 등에서 필요한 경우 실명확인 절차를 거치고 있다”며 “게시판까지 실명화하게 되면 인터넷 사업자들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보유함으로써 사생활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우려를 표했다.
한국게임산업연합회 최승훈 국장은 “인터넷게시판 실명제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될 것이라는 게 게임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전했다.
시민단체들은 인터넷게시판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도 높다고 주장한다.
참여연대·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인권운동사랑방 등 총 55개 사회단체들이 결성한 ‘인터넷국가검열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지난달 31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인터넷을 강제적으로 실명화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정보통신부는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같은 반발에 대해 정통부는 “명예 훼손 등 인권침해의 예방을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정정도의 제약은 불가피하다”며 “게시판 실명제가 책임있는 토론문화 및 건전한 사이버 공간 조성에 기여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섣부른 실명제 시도는 공직자 비리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각종 공공부문에서 비리가 발생할 여지가 많은 현 상황에서 정부 내부 고발자의 입을 막을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변재일 정통부 차관은 “정부 게시판의 경우 내부 제보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 일부 운영자만이 내용을 볼 수 있는 익명게재를 허용하겠다”는 뜻을 비친 바 있다.
그러나 공대위는 “익명은 구조적으로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표현을 보장하고 조직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무조건 실명을 쓰라는 것은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을 억압하는 권력의 폭거”라고 주장했다.
<찬성> “사이버 명예훼손 예방 위해 실명제 실시는 불가피” - 정통부 인터넷정책과 김준호 과장
“인터넷의 특성인 익명성을 악용한 유언비어 배포 등 사이버 명예훼손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게시판의 실명화는 이같은 피해사례를 최소화하고 건전토론문화를 마련하는 데도 일조할 것이라고 봅니다.”
게시판 실명제 담당부서인 정통부 인터넷정책과 김준호 과장은 사이버 명예훼손 등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실명제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김 과장은 2001년부터 올 2월까지 사이버 명예훼손·성폭력상담센터 신고현황을 조사한 결과 2001년 196건, 2002년 3616건, 2003년 1087건 등으로 해마다 신고건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명 게시판 폐해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김 과장은 “명예훼손 등 인권침해 예방을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정수준의 제약이 불가피하다”면서도 “개인정보 확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보유출 등의 문제나 사회적 소수의견을 담을 채널을 차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대> “인권보호 위해 실명확인용 DB제공에 제동건 것”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실장
정통부 등을 불법적인 개인정보 DB 제공 및 이용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한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장여경 정책실장은 단호했다.
특히 일각에서 게시판 실명제를 계정 실명제와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해 “실명제는 DB를 통한 실명확인 없이는 시행이 불가능하므로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게시판 실명제에서도 논의의 핵심은 실명확인 DB 문제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명확인용 DB 제공에 제동을 건 것은 무엇보다 인권 보호를 위해서다.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이 있기 때문.
장 실장은 인터넷이 이미 계정 등록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실명화돼 있는 데다 모든 행위의 흔적이 네트워크에 고스란히 남는 상황임을 환기시킨다.
장 실장은 “현재 상태에서도 범죄자에 대한 추적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에서 게시판까지 실명화하게 되면 개인의 인권은 바람앞의 촛불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익명성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며 “게시판 실명제는 이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시도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안은 무엇인가>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게시판 실명제의 대안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건전토론을 위한 캠페인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다음측은 “게시판 실명제의 대안으로 올바른 인터넷 이용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네티즌 교육에 힘쓰고 잘 쓴 게시물을 적극 추천함으로써 토론의 흐름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며 “실제로 다음은 다음사이트의 핫이슈토론 코너를 이같은 방식으로 운영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게임 업계는 한 발 더 나아가 정부 홈페이지의 게시판 운영을 재고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게임산업연합회 최승훈 국장은 “외국 정부 홈페이지의 경우 게시판이 거의 없다”며 “정부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실명/익명이 아니라 아예 선별적으로 개설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김성호 실장은 “업계 일각에서는 현재 신용정보회사 DB 등을 이용해 부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실명확인을 행자부 DB를 이용해 전면 시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부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없애는 문제는 가뜩이나 국민의 의견반영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게시판 실명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소지가 크고 행자부 DB의 개방문제는 행자부도 원치 않는 일인 데다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어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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