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BM 중역에서 LG IBM의 대표로, 그리고 토종 IT회사의 최고경영자로.
변보경 코오롱정보통신 사장의 간추린 이력이다. 그는 세계 선두 IT기업의 임원과 대기업 IT계열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IT베테랑’으로 꼽힌다.
한국IBM에서 PC와 중대형시스템 등 여러 사업부문을 거친 그는 지난 97년 오창규 전 한국IBM 사장의 요청으로, LG와 손잡고 LG IBM을 창설을 주도했다. 그리고 LG IBM이 매출 4500억원 규모의 회사로 성장할 때까지 경영을 맡았다.
깊게 쌍꺼풀진 눈, 준수한 외모, 특유의 미소에서 발산하는 친화력, 격식을 따지지 않는 언행 등은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거리낌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압도하기보다는 감싸안으며 이해시키는 게 그의 무기다. 이런 인간적 매력이나 스타일은 그대로 최고경영인의 탄탄한 자산으로 이어진다. 이런 무기를 바탕으로 그는 코오롱정보통신에 와서 조직의 흩어진 의견을 모으고, 한목소리가 되도록 하는 아교와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코오롱그룹이 그를 선택한 것은 업계에서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다. 계열사 최고경영자를 내부에서 발탁하지 않고 외부에서 스카우트한 사례는 그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지난 1년동안 코오롱정보통신에 ‘혁신’의 바람을 몰고 오며 그룹내는 물론 업계 안팎의 주목을 받아 왔다.
스스로의 장점을 ‘부수고 바꾸는 것’을 꼽는 그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 쇄신의 바람을 몰아왔다. 무엇보다 시스템 유통회사로 인식돼온 코오롱정보통신을 종합 IT서비스 업체로 일대 탈바꿈하겠다는 각오로 뛰어들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비전 2005’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이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을 준비하는 이른바 ‘100일 캠페인’을 마련했다. 비효율적 부문은 과감히 개선해 새로운 조직의 틀을 짰다. 자회사들도 과감히 통폐합했다. 올해 1월 서울 삼성동으로 본사를 옮기면서는 코오롱그룹 계열사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인사·직급·급여·인센티브 체계를 시행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의 하루 스케줄을 모든 직원에게 개방하는 등 혁신작업에 직원들이 동참하도록 했다. 또 매주 수요일 직원들과 자유스럽게 토론하는 ‘라운드 테이블’ 미팅을 열고, 직원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해주면서 신뢰를 쌓았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일단 회사가 도약하고 ‘이륙’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고 자평하고 있다.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직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성과로 꼽았다.
이달로 취임 1년째를 맞는 그는 “지난 1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겉으로 표시는 안했지만 정말 힘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작년에 내가 ‘49’세로 아홉수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심지어 ‘죽을 수’였다나요. 그게 바로 인생의 전환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수업료도 많이 냈지요.”
사실 지난 1년동안 코오롱정보통신에 몰아닥친 변화는 회사창립후 10여년간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였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편한 직장인데 왜 바꾸는가”라는 직원들의 사고를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직원들과 매일 ‘기 싸움’을 벌였다.
“1년동안 정말 살얼음판을 걸어 왔습니다. 저항이 있어도 밀어붙이다 보니, ‘저거 미친 놈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이젠 ‘우리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진 직원들이 많아졌다는데 보람을 느낍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시스템 유통회사’쯤으로 인식돼 온 코오롱정보통신을 ‘종합 IT서비스 업체’로 일대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은 목표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IBM 시절에도 외국인과 치받고 싸운 사람은 나뿐이었지요.”
그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배어있다.
무엇보다도 힘이 되는 것은 그에 대한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의 강한 신뢰감이다. 그가 무엇을 의논할라치면 이 회장은 “그것하라고 데려온 건대…. 힘들더라도 갑시다’라고 격려해주는 식이다.
그를 잘 아는 주위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일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것이다. 그도 자신을 ‘일벌레’라고 자인한다. 편히 안주하는 것을 절대 못하는 스타일이다. 용인 소재 집에 사무실을 꾸며 놓고 퇴근해서도 업무를 볼 정도다. 또 변화를 굉장히 즐긴다.
“주변에서는 그런다고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니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 회사에 ‘프로’로 온 것이지 단순한 ‘월급쟁이’로 온 것이 아닙니다. IBM에서 쌓은 경험을 걸고 코오롱정보통신을 한국의 IT대표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떠날 생각입니다.”
그는 솔직하고 투명한 것을 좋아한다. 뭐든 열심히 해야지 대충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적당히 재주 부려서는 일류가 될 수 없습니다. 뭐든 진지해야지, 거들먹거리면 자신에게 손해가 됩니다. 누구와 얘기하든 진지해야 합니다.” 이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은 선친이 물려준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지켜라’이다. 비즈니스도 사람관계도 신뢰가 바탕이 안되면 절대로 못이룬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이런 좌우명이 변 사장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심리적 근간이 된다.
그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밤에도 운동을 즐긴다. 아침에는 물론 퇴근해서도 1시간에서 길게는 90분 동안 러닝머신을 달리며 땀을 흠뻑 흘린다.
“평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데다 그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건강이 따라주지 않으면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회사가 목표궤도에 올라갈 때까지는 열심히 운동할 작정입니다.”
올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줄에 들어선 그는 두가지의 목표와 관심사를 붙들고 있다. 하나는 회사와 직원들을 일류회사, 일류 직장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업에서 떠날 때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물음이다.
“회사를 떠날 때 기여를 많이 했고 ‘그사람 때문에 일류회사가 됐고 일류 직장인이 됐다’는 평가만 들으면 그만이죠.”
이런 그의 자세는 얼마전 30년 지기로 둘도 없던 친구인 조정태 전 LG IBM 사장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은 30여년 전 종로학원 재수생 시절에 알아 대학과 회사를 같이 다녔다. 그러다보니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읽게 되고, 고민도 같이 나눴다. 그런데 이제 그런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요즘도 그 친구가 꿈에 보입니다. 그러면 ‘니가 못다 이룬 꿈까지 내가 이뤄줌세’라고 그 사람에게 약속하곤 합니다.”
사람 특히 경영인을 평가하는 것은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떤 역할을 했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옳다면, 그는 지금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시점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글=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사진=이상학기자 @etnews.co.kr>
◆약력 △1953년 생 △경기고 △서울대 공대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와튼 스쿨, 최고경영자 교육 MBA 프로그램 이수 △한국IBM 입사(79) △영업부장(84) △IBM 아시아태평양 본부 파견근무(88) △한국IBM 중소형 시스템·PC 영업 지사장(90) △기획조정실장(92) △경영동반자 사업본부장(94) △PC 사업본부장(96) △LG IBM PC 시스템영업본부장(97) △LG IBM 대표이사 사장(2000∼2002.2) △코오롱정보통신 대표이사 사장(2002.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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