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6일, 신간센 기차 안.
에이지는 홋카이도 촌놈이다. 홋카이도에서도 동북쪽의 네무로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는 오호츠크해의 공기를 쐬며 성장하였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넓은 초원과 눈과 가끔 나타나던 곰밖에 생각이 안난다. 그러고 보면 히로코도 촌년이다. 일본 본토의 북부에 있는 아키타(秋田)현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산간지방인 아키타는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데 그래서 히로코도 제법 생겼나?
고이즈미 전무에게 작별을 고하고 에이지는 고베(神戶)로 내려가는 신간센에 히로코와 앉아 모처럼만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니다 수재라는 칭찬을 한몸에 받으며 홋카이도의 중심지 삿포로의 고교에 진학하고 거기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도쿄대 공학부에 입학하였을 때 에이지의 동네에서는 경사라고 잔치를 벌였다. 아마 그 때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을지 몰라. 30년에 가까운 회사 생활에서 한번도 두각을 내보인 적이 없는 에이지는 지나간 세월을 쓸쓸히 돌이켜본다.
“에이지상, 고베에는 자주 가봤어?” 고즈녁히 창밖을 내다보는 에이지의 모습이 안됐던지 히로코가 부러 애교를 내 물어온다.
“음… 그러고보니 한 10년 전에 통신기지국 점검하러 한번 가본 것이 전부이군.”
“난 사실은 처음 가보는 길이에요.”
“그래?”
에이지의 놀라는 목소리에 둘은 다시 숙연해진다. 얼마나 힘든 생활이길래 일본인으로 태어나 그 유명한 고베에 가볼 일이 없었을까?
JR 고베역에 내리니 오후 두시다. 고베는 역시 양풍이다. 1867년 명치유신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 고베항이 세계에 개항됐다. 고베가 속하는 효고현의 첫번째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였으니 근대화를 꽤 서둘렀을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일본서민들에게 있어 근대화라고 하면 박래품, 즉 배를 타고 서양에서 온 물건이었는데 박래품이 들어오는 가장 큰 항구가 고베와 요코하마가 아니던가? 특히 고베는 주위에 상인의 도시 오사카, 사카이 등이 있어 거래가 더 왕성했고 따라서 일본 최강의 조직폭력단이 고베에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
“에이지상, 서양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뭔지 알아?”
낯선 역에 내린 히로코의 뚱딴지같은 질문이다.
“뭔데?”
“카레라이스.”
“왜?”
“재료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거든. 그리고 먹기 간단해서 바쁜 사람들에게는 최고지.”
“그러니까 지금 카레라이스를 먹자는 이야기야?”
“서양에서 온 음식은 고베가 제일이에요.”
역에 이어진 상점가에 들어가니 카레집이 곧 눈에 띈다. 카레라이스 둘을 시키니 비로소 고베에 온 목적에 생각이 다다른다.
“점심 먹고 어디로 가지?” 에이지가 묻는다.
“우선 아시야 시청으로 가봅시다.”
“음… 그게 제일 낫겠군.”
1999년 6월 6일, 아시야 시청.
아시야 시청에 들어서니 우선 눈에 띄는 것이 1995년 대지진의 복구현황판이다. 동네가 불타고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 주저앉았던 한신(阪神) 대지진에서 아시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적계에서 가서 아키라의 원적지 주소를 대니 휠체어를 탄 직원이 나타난다. 50은 돼 보인다. 핸디캡의 신분으로 시청에 근무하였다면 아마 오래 있었을 것이다. 에이지는 잘 만났다고 생각하며 말씨를 공손하게 다듬어 물어본다.
“사실은 이 주소에 사시는 후지사와 가문의 장남이 같이 JTT에 근무했는데 이 세상을 뜬 관계로 가족에게 좀 알리려고 왔는데 지금 누가 사십니까?”
에이지의 질문에 시청 직원은 대답을 않고 안경을 벗어 싸구려 넥타이에 닦는데 안경알의 기름이 없어지기는 커녕 기름무니만 생기는 것 같다. 무언가 사연이 있나? 에이지도 말을 재촉하지 않고 시청 직원의 안경 닦는 동작을 같이 봐준다.
별로 깨끗해지지 않은 안경을 기름이 많이 흐르는 콧잔등 위에 얹어 놓은 후 직원은 입을 뗀다. 목에 건 신분증에는 혼다라고 써 있다.
“그 사건은 나도 압니다.”
“네? 후지사와 아키라의 자살 말입니까?”
“예. 여기서도 신문은 보니까요.” 다소 냉소적인 어조다.
“아, 그야 물론 센세이셔널한 사건이니까… ”
“뿐만 아니라 내가 후지사와 가문의 내력을 잘 안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이곳에 오래 있으면 이런 저런 일을 다 보지요.”
이 말에 펀치라도 맞은 듯 에이지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데 히로코가 한마디 거든다.
“그럼 그 주소지에는 누가 사시나요?”
“아무도 없어요.” 사내는 다소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집은 커다란 저택인데 현재 팔려고 부동산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
“그게… 뭡니까?”
“유일한 직계 생존자인 후지사와 부인, 즉 선생의 친구되는 후지사와 아키라씨의 모친이 현재 중병으로 병원에 장기요양중이어서 진행이 안되는 모양이더군요.”
“그럼 아키라군의 부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아가셨습니다. 95년 대지진 때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지진이 있은 후 후지사와 데츠로상을 간호하는 간호사가 방문했을 때 계단에서 굴러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허… ”
남의 일이지만 너무도 드라마틱한 변화에 에이지도 히로코도 말을 잃는다.
“그럼 후지사와 부인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호적상의 변동과 관계가 없는 일이어서… ”
하긴 그럴게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움직일까? 에이지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이 때 에이지의 마음을 읽은 듯이 사내가 입을 연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후지사와 아키라상의 가족을 그리 만나려 하십니까? 단순한 사망 통보가 아닌 듯한데요?”
“네… 실은 아키라군과는 대학동기생이고 친한 친구입니다. 그의 죽음이 너무 이해가 안돼서 일을 팽개치고 이렇게 나선 겁니다.”
“그러시군요… 사실은 제가 후지사와 아키라상을 좀 알지요. 저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한해 선배거든요. 제가 참 좋아하고 따랐었는데… ”
검고 기름이 흐르는 피부가 큰 머리통을 싸고 있어 영 섬세한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내가 안경 너머로 눈알에 물기가 돌며 목소리에 콧물이 섞인다. 에이지와 히로코도 아키라를 생각하며 잠시 슬픔에 잠긴다. 아시야 시청의 카운터에서 서로 모르는 세 사람이 아키라의 슬픔을 목도하고 있다니… 우스운 장면이다.
사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말을 잇는다.
“아시야역 앞에 가면 후지부동산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시면 주택전매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리고 후지사와 부인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있으시다면 록코산(六甲山) 속에 있는 덴구진자(天狗神社)의 주직(住職)을 한번 찾아가 보세요. 히구라시(日暮)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눈빛으로 사내는 말한다.
시청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니 운전수의 말투가 영 낯설다. 간사이(關西) 사투리도 가지가지라고 하더니 이 말투는 처음 듣는 방언이다. 두 블록도 채 안가 역전이다. 아시야 역전은 역시 부촌답게 고급스러워 유럽의 시골도시를 연상시킨다.
후지부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노인네 둘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부부임에 틀림없는데 이들이 주인인가?
“저, 뭐 좀 여쭤보러 왔습니다.”
“네, 무슨 일인지… ” 여자 노인네가 먼저 받는다.
“후지사와 댁에 관해서 좀 여쭙고자 하는데요… ”
이 말에 펑퍼짐하며 얌전하게 생긴 여자 노인네의 얼굴에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이 지나간다. 남자 노인네는 들고 있던 일본찻잔을 급히 탁자에 내려놓는데 입을 급히 다물었던지 찻물을 흘린다.
아니 후지사와라는 말이 무슨 신비의 부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 노인네들이 왜 이름 한마디에 이리 놀라고 당황할까 궁금증이 더해가며 에이지는 말을 부드럽게 가라앉힌다.
“다름아니라 그 댁의 장남인 후지사와 아키라의 친구입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 후지사와 부인을 좀 만나고 싶은데 시청에 가니 이곳을 알려주더군요.”
그 말에 두 노인네는 다소 안심을 하는 기색이다. 에이지와 히로코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남자 노인네가 입을 연다.
“우리는 이 쪽 사람들인줄 알고 놀랐습니다”하며 자신의 오른쪽 볼에 검지손가락으로 줄을 긋고 실로 꼬맨 자국을 흉내낸다.
금방 이해가 안돼 에이지가 멍청하게 서있는데 히로코가 속삭인다.
“야쿠자 말이에요.”
“어?”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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