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IT과제](19·끝)이공계 인력양성 내실화

 ‘하루빨리 탁상위 숫자놀음에서 벗어나 정책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산학계의 주요 인사들이 정부의 이공계 인력 육성정책에 대해 던지는 충고다. 그동안 정부가 ‘10만, 100만 양병’이라는 식의 성과제일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이공계 대학교육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교육수료생의 숫자를 늘리는 데 급급하다보니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시스코시스템즈 등 국내에서 전문가인증(CP:Certified Professional)제도를 운영하는 외국계 유명 정보기술(IT)기업들의 배를 불려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해왔다.

 지난 95년부터 활성화된 4대 외국계 IT기업의 CP제도는 각각 10만명 이상의 자격증 소지자를 양산, 국내 IT 연구개발 및 컨설팅 인력채용의 척도로 쓰일 정도로 정착했다. 이에 따라 외국계 기업들은 연평균 100억원을 넘어서는 CP 관련 매출(교육비·시험인증료)과 자사 제품의 전도사를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 사냥으로 즐거운 비명이다.

 정부의 관련부처들도 보다 많은 IT전문가를 확보하고 실업자의 재취업 기회를 넓힌다는 취지 아래 교육비의 50%를 지원, CP가 국내에 안착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CP 취득자들이 단순 관리자의 단계를 넘어 전문가로서 현업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예를 들어 시스코시스템즈가 운영하는 네트워킹전문가인증(CCNA)프로그램의 합격률이 80%를 넘어서지만 현장에서 시스템장애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CCIE)의 합격률은 5%에 불과하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해 실무능력을 갖춘 전문가인증 획득비율이 5%를 밑돌고 있다.

 국내 IT기업의 한 최고경영자는 “CP가 시험과 이론 위주의 평가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격증 소지자라고 할지라도 실무에 곧바로 투입하기 힘든 실정이어서 CP를 인력채용의 절대요건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산학계 인사들은 껍데기에 집착하는 인력정책을 해결할 대안으로 ‘정책실명제’를 제안하고 있다. 정책입안·관리자로 하여금 ‘몇 명을 양산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실무능력을 가진 전문가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싸맬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정책입안·관리자들의 책임감을 높이자는 주장이다.

 최근들어 새 정부가 탁상공론식 인력육성정책을 그대로 물려받는다면 IT, 바이오기술(BT)을 포괄하는 21세기 과학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그간의 노력이 자칫 물거품이 되리라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정책으로 말미암아 대학 진학자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고 기존 학생들마저 학과를 바꾸거나 사법·행정·외무고시에 매달리는 등 이공계 교육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98년 37만5000여명으로 전체 수능시험 지원자의 42.4%를 차지했던 이공계 지원율이 2002년에는 19만9000여명, 26.9%로 줄었다. 현직 이공계 연구원과 대학원생의 56%가 인문·사회·예술계로 전환할 것을 고려해보았고 연간 3만명을 넘어선 해외유학생의 31%도 국내에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정착하려는 계획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인력누수의 원인은 단순히 전자·IT분야의 대졸 평균 초임(연봉)이 1800만∼2300만원으로 금융(2400만∼3000만원)이나 신용평가회사(3500만원)에 뒤떨어지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변호사, 의사 등 권력형 직업을 좇는 사회적 가치관과 질적인 발전을 외면한 채 제자리걸음을 거듭하는 이공계 대학교육의 현실이 인력누수현상의 주범인 것으로 풀이된다.

 당장 미국처럼 전문 엔지니어의 시간당 임금(31.37달러)이 법조인(32.35달러)과 비슷한 사회적 구조를 실현할 수는 없겠지만 이공계 대학에서 일어나는 누수현상을 꼼꼼하게 메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간판만 내건 대학부설연구소들이 난립해 국민의 세금(정부지원금)을 좀먹는 현상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전국 380여개 국·공·사립대학에 1500개 이상의 부설연구소가 설립돼 정보통신·경제정책·기초과학·인문과학·의학·우주항공·자연과학·사회과학·기계기술·품질혁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 자못 ‘과학기술강국의 꿈을 이룰 산실’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학부설연구소를 거친 인력을 곧바로 현업에 투입하지 못하고 자체 인력육성제도를 통해 다시 교육해야만 한다”는 어느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 대학부설연구소의 현주소다.

 대학교육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일선 기업들이 ‘될성부른 인재를 미리 확보하기 위한 수준의 지원’을 펼칠 뿐 진정한 산학협력을 외면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책실명제의 기치 아래 뿌리(대학교육)와 가지(고급 전문가 양성)를 면밀하게 관리해 ‘과학기술 강성대국의 토대’를 다질 때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

 

 <도움말 주신 분=김사중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기술개선팀장, 김학훈 날리지큐브 대표,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 서진구 코인텍 대표, 최승억 웹메소드코리아 대표, 현석진 사이버다임 대표(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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