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를 살리자는 말은 더이상 하지 말자.’
벤처 침체기가 시작된 후 지난 2년간 각계로부터 벤처 내부의 문제점 및 법·제도, 정책, 인프라 등 각종 생태계에 대한 많은 문제점과 해결책이 제시돼 왔다. 이제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식의 접근은 필요없다.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내 실천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벤처 활성화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코스닥시장이 기능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새정부가 경제성장의 동인으로 신기술 산업을 꼽는다면 모든 정책에 우선해 코스닥 재건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벤처캐피털협회 이부호 이사는 “코스닥이 뒷받침돼야만 기업들이 성장에 필요한 직접금융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뉴비즈니스는 나오지 못한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코스닥이 제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은 아직 높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듯이 지금의 코스닥시장은 등록과 퇴출에 대한 마땅한 기준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20년의 연구개발이 필요한 정통 바이오기업의 경우, 일반 IT기업 위주의 현 체제하에서 코스닥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분명 IT, BT 등 각각의 산업별 특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천편일률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등록 기준을 시장에 맡겨 그 특성에 맞는 세부적인 요건을 마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칼자루를 쥐고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로크업, 대주주 지분변동제한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어떤 식의 제도가 필요하다면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좀더 합리적이고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규제를 위한 규제는 필요치 않다. 우선 규제해 놓고 시장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개선되는 현재의 구조는 불합리한 점이 너무 많다. 효율적인 운영부분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공정거래, 시장질서 위배 등만 감독하면 된다.
지금은 무엇보다 코스닥의 기능회복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코스닥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새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신경제의 대안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업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진정한 글로벌 스탠더드=벤처는 더이상 지원이나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벤처 현실은 정부의 지원이 너무 많고 당연히 규제도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벤처를 포함한 모든 기업의 목적은 최대의 이익창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시장에서의 이전투구를 접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해야 하는 게 진리다.
코리아벤처포럼의 오세기 사무국장은 “쥐꼬리만한 시장에서 서로가 서로의 살을 파먹는 식의 경쟁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벤처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응하는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벤처인증, 이노비즈 등 정부가 벤처를 규정짓는 벤처정책이 존재하는 한 현재의 지원위주 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벤처캐피털의 육성도 시급하다.
벤처기업협회 이부호 이사는 “창투사, 신기술금융사, 구조조정 전문회사는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벤처캐피털은 없다”고 말한다. 즉 벤처캐피털이 하나의 금융산업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육성에 대한 법으로 부속돼 있을 뿐 프라이빗에쿼티(투자회사)에 관한 별도의 법조차 갖춰지지 않았다는 게 단적인 예라고 설명한다.
◇선택과 집중의 실천=모든 벤처 유관분야에서 선택과 집중을 위한 과감한 구조조정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양적 성장주의에서 질적인 성장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단 조정자 역할은 시장 자체에 맡겨야 한다. 정부는 지금까지 추진됐던 정책 중 잘된 점과 부족한 점을 평가, 취사선택하면 그만이다.
여성벤처협회 이영남 회장은 “벤처 옥석가리기를 추진한다는 구실로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통해 앞서나가는 벤처기업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 회장은 “정부는 부실 벤처가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시장이 자율적인 정화작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장우 경북대 교수(서울벤처인큐베이팅 소장)도 “정부의 창업보육지원사업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양적 팽장 중심으로 추진돼 왔으나 최근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며 “정부가 이를 단순한 지원정책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질적 육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질적 평가를 통해 센터별 선별 지원하고 무책임한 운영기관은 과감히 추려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원칙만 지켜진다면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는 최소화될 수 있을 것이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
▲도움말 주신 분=이영남 여성벤처협회 회장, 오세기 코리아벤처포럼 사무국장, 이부호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이사, 이장우 경북대 교수, 이승기 액서지 사장, 오형근 벤처기업협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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