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2일 도쿄 히비야 JTT 사옥.
“부장님, 큰일났습니다.”
아직 술이 덜 깨어 차를 마시며 조간을 넘기고 있는 다나카 에이지가 고개를 드니 옆 부서의 차장인 무네기시 요시오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재수없군.’
말이 부장이지 에이지는 소위 창가 매니저다. 출근하여 창가 책상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기만 해도 월급은 나오는 사원. 회사에서는 빨리 나가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당연히 부하가 없다. 그런데 이 요시오라는 자식이 “부장님”하며 수시로 부아를 건드린다. 참외를 거꾸로 세운 것 같은 역삼각형의 얼굴에 머리카락은 빡빡하고 이마에는 항상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성질이 있어 보이는 놈이다.
‘지쿠쇼(새끼)….’
벌써 속이 뒤틀려 욕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묻는다.
“무슨 일인가?”
묻고 나도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이놈의 이마에 오늘따라 개기름이 더 진하고 뭔가 복잡한 구석이 엿보인다.
“후지사와상이….”
“후지사와? 어느 동네 후지사와야?”
에이지의 말투가 삐딱하다. 평소라면 벌써 눈에 흰자위가 커지며 상대방 혈압 올릴 응대를 준비했을 요시오가 아직도 조용하다.
“경영기획부장 말인가?”
에이지는 정색을 하고 요시오를 쳐다본다.
“네.”
“그래. 무슨 일이야?”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사옥 옥상에서 투신하여 즉사하였습니다.”
“뭐라고?”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입사동기생 후지사와 아키라의 이야기가 아닌가?
충격으로 간밤의 술기가 싹 가시는데 에이지의 뇌리를 번개같이 지나가는 것이 있다. 출근하여 컴퓨터를 켜고 수신 e메일 목록에서 후지사와의 이름이 있는 것을 언뜻 보았으나 숙취가 심해 제대로 읽어볼 마음도 없었다. 정신이 바짝 들어 급히 e메일을 열어본다.
발신 : afujisawa@jtt.co.jp
수신 : etanaka@jtt.co.jp
제목 : 마지막 부탁
에이지군,
오랜 세월 신세 많았네. 뒤를 잘 부탁하네. 자네 키보드 밑에 작은 봉투를 하나 놓았네. 내 인생의 내력일세. 태울까 하다 자네에게만 남기네. 저 세상에서 만나면 좀 더 즐겁게 지내세.
후지사와 아키라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황급히 키보드를 들춰보니 작은 종이봉투가 있다. 분명 어젯밤 늦게나 오늘 새벽에 놓고 간 것이 틀림없다. 열어보니 간단한 메모와 열쇠 하나가 들어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보고에 컴퓨터를 봤다가 키보드를 들췄다가 하는 에이지를 보고 요시오의 얼굴이 평소의 멸시조로 돌아오며 묻는다.
“뭐 있습니까?”
에이지는 봉투를 급히 주머니에 넣으며 말을 돌린다.
“그래, 회사에서는 다 아는가?”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로 고이즈미 전무께서 좀 보자고 하십니다.”
임원층으로 올라가니 고이즈미의 비서가 기다리고 있다. 방으로 들어가니 고이즈미는 소파에 깊숙이 앉아 담배를 힘껏 빨고 있다. 턱으로 소파를 가리킨 후 담배만 빨 뿐이다. 은발의 단아한 모습이다. 고이즈미는 바른 말 잘하고 아랫사람에게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로 직원들 사이에 신망이 높다. 특히 도쿄대 출신이 틀어쥐고 있는 JTT의 엘리트그룹 중 와세다 출신으로 JTT의 다섯손가락에 드는 실력자이기도 하다.
비서가 들어와 차를 놓고 나가자 담배에 연달아 불을 붙이며 고이즈미가 입을 연다.
“이야기 들었는가?”
“네. 들었습니다. 충격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아침에 출근하여 소식을 들었네. 원래 사장과 우정성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취소하고 이렇게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네.”
“….”
“참 이럴 수가. 후지사와군은 앞으로 JTT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라고 의심치 않았는데. 실은 오는 주주총회에서 지주회사의 전무로 발탁되도록 내정이 되어 있었구만….”
“전무님은 어제 후지사와군과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이상한 눈치라도…?”
“글쎄…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장단이 모두 우정성에 인사를 갔을 때 그가 실무자로서 동행했지. 돌아와 호텔 리셉션이 있은 후 사장단 저녁회식까지 계속 같이 있었구만. 하지만 그 친구 자리가 말석이라 별로 말할 새도 없었지….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그 친구 회식이 끝난 후 아카사카의 요정에 같이 갔구만. 사장님이 끌고 가다시피 해 그 친구치고는 드문 요정 출입을 한 셈인데. 드라이한 사람이라는 평과는 달리 꽤 술도 하고 노래도 한곡 할 정도로 보기 드물게 센치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투신자살이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좀….”
에이지는 열쇠 이야기를 꺼낼까 망설인다. 하지만 뭔가 뒤에서 당기는 것이 있어 말을 안하고 있는데 고이즈미가 말을 잇는다.
“자네는 후지사와군과 가까웠다는 소문이더구만. 친구가 별로 없는 그에게는 드물게 말이야.”
“글쎄요, 가깝다는 표현이 어떨지…. 서로 일하는 분야가 달라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전무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친구가 술자리에 가는 편도 아니고….”
에이지가 말끝을 흐린다. 둘 사이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도 무언가 짚이는 게 없나? 여자관계라거나… 큰 빚이 있다거나….”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아무튼 골치 아프게 되었군. 경찰에서 한동안 조사를 할 것이고 매스컴은 또 살판났구만….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말은 적당하지 않지만 타이밍이 너무 나빠. 이제 JTT그룹이 새로 출발하는 마당에…. 그리고 하필이면 왜 사옥에서 투신을 하나. 하고많은 장소 중에서….”
고이즈미 전무와 이야기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귀에 맴돈다.
‘왜 하필이면 사옥에서….’
설혹 죽음을 피하지 못할 사연이 있더라도 회사에 대한 충성심에 가득 차 있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회사에 무슨 원한이라도?
아키라가 놓고 간 열쇠가 큰 숙제로 다가옴을 느낀다. 그 열쇠가 아키라의 유언일지 모르겠다. 후지사와 아키라…. 힘없이 내딛는 계단가의 창으로 히비야 공원이 보인다. 그리고 에이지의 마음은 30년 전으로 돌아간다.
1969년 1월 18일 도쿄쿄대학 야스다 강당.
“파쇼 철폐!” “안보 반대!”
목이 터져라 외치며 학생들이 돌을 던진다. 좌익사상이 아직 캠퍼스를 휩쓸어 대학생들이 도쿄대의 상징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자 대학측의 요청으로 8500명의 경찰기동대가 투입되었다. 하늘에서는 4대의 헬기가 최루탄을 쏘아대고 지상에서는 물대포와 가스총이 발사되는 상황에서 오후 3시께 학생들이 점차 밀리기 시작, 뿔뿔이 도망가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흥분, 배고픔이 뒤섞여 눈이 퀭한 학생들이 방향 없이 밀고 밀리는 가운데 옆으로 벗어난 에이지의 눈에 경찰의 물기둥을 맞고 나가 떨어지는 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빈약한 몸이 거의 날듯이 튕겨져 화단의 모서리에 되게 부딪힌다. 안경이 깨지고 이마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에이지가 뛰어나가 부축해 일으키는데 웬 여학생도 따라붙으며 외마디를 지른다.
“아키라!”
이 친구의 이름이 아키라구나 생각하며 에이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물보라와 최루가스로 시야가 어지러운데 산시로 연못 쪽 나무 밑에 다소 한가로운 구석이 눈에 뜨인다.
“저리로”하고 턱짓을 하며 에이지가 아키라의 상체를 들고 일어나자 여학생이 다리를 겨우 들고 따라 붙는다. 나무 밑에 누이고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낸다. 이마가 조금 찢어졌을 뿐 큰 상처는 아니었다.
아키라가 정신을 차리자 셋은 서로 부축하고 도망가기 시작한다. 일단 경찰에 잡힐 위험을 벗어나자 천천히 오차노미즈 쪽으로 향한다. 일본대·중앙대 그리고 명치대 학생들이 오차노미즈를 해방구로 점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까닭이다.
오차노미즈의 개천은 좁지만 깊은 녹색의 물이 서서히 흐른다. 지상의 난리법석과는 무관하게 초연하다. 셋은 둑에 걸터앉아 겨우 한시름 놓고 담배를 피워 물며 서로 소개를 한다.
“고맙습니다. 나 경제학부의 후지사와 아키라에요.”
“공대의 다나카 에이지라고 합니다.”
“저는 오차노미즈 여대의 모리 에리카에요. 아키라군을 따라 야스다 공격에 참가했어요.”
이것이 그들의 만남이었다. 아키라와 에이지가 모두 4학년이었다. 청춘시절, 기성 권력에 반대하는 데모의 와중에서 만난 그들. 그리고 30년이 지나 기성세대의 일원이 되어 사옥에서 투신해버린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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