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게임문화 현장을 가다]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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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게임의 강국’. 최근의 독일을 지칭한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콘솔 위주로 게임문화가 형성돼 있는 것과 달리 독일은 PC게임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영국, 프랑스와 동일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특징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독일오락소프트웨어협회(VUD)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PC게임 규모는 6억9300만유로(8648억원)로 나타났다. 판매대수로는 3464만개. 독일 전체 게임산업에서 PC게임이 규모와 판매대수 모두 45% 이상 차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독일이 PC게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독일인의 민족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PC게임을 하는 것은 기술적인 장벽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단순한 슈팅게임보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 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렇다고 독일이 콘솔게임에서 황무지인 것만은 아니다.

 2001년 전체 게임시장 15억2800만유로(1조9069억원) 가운데 콘솔게임이 5억유로(6240억원)에 이른다. 더구나 1999년에 5억4100만유로에 불과하던 콘솔게임 시장은 2000년 6억1000만유로, 2001년 5억5600만유로 규모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게임은 ‘학생만 하는 것’이라는 어른의 인식도 바뀌고 있고, 컴퓨터게임을 등한시하는 고정관념도 서서히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VU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독일 게임인구 연령층이 점차 내려가는 추세여서 게임산업 저변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14세 이상 독일인 가운데 20% 이상인 1300만명이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이 중 80%가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남성의 84%, 여성의 91%가 규칙적으로 게임을 하고, 게임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액에서도 남성의 경우 매달 125유로(15만6000원) 이상 지출하는 사람만 1.5%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독일 게임인구는 이처럼 조용하지만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독일의 유력 게임잡지인 ‘게임스타(GameStar)’ 조에르그 랑어 편집장도 “독일내 PC 보급대수를 1100만대라고 추산할 경우 700만명이 가끔 게임을 하고, 취미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만도 200만명에 이른다”며 “최근에는 여성층에서도 수요가 늘어 게임인구 저변이 확산되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과 달리, 게임산업을 육성하려는 독일 정부와 투자자의 의지는 미약하고 게임개발회사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은 최근 유럽 내에서도 극심한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독일 현지법인의 한스 스테트밀러 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통독 후유증’이다. 많은 세금이 옛 동독 지원에 쓰이고 있고 선진국을 대변하는 사회보장제도도 경기에 짐이 되고 있다.

 풀어야 할 숙제가 산재해 있는 독일 정부가 게임산업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투자사들도 게임업계를 외면하고 있다. 경기가 위축되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상책. 모험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국민성답게 독일 투자사들도 게임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금에 허덕이는 개발사가 한 두 곳이 아니다. 개발사라고 이름을 내건 회사가 20개 남짓 되는데 실제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회사는 8개가 고작이다. 이 중 6개 회사도 폐업위기에 몰려 있을 정도. 물론 선플라워가 90년대 중반께 내놓은 ‘아노1503’의 성공처럼 독일 개발사의 게임도 성공한 사례가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독일의 게임개발 현황으로 볼 때 또다시 성공사례가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게임 개발회사 입장에서도 독일은 호락호락한 시장은 아니다. 아이디어나 기술은 뛰어나지만 워낙 인건비가 비싸고, 언어적인 한계 때문에 독일어권 국가를 제외하고는 해외수출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법복제가 50∼70%를 웃돌고 있어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많은 회사들이 체코나 러시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 회사에 외주를 주거나 아예 근거지를 동유럽으로 옮기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지금 독일은 자국에서 개발한 게임보다 외산게임의 인기가 더 높다. 정부의 ‘뒷짐 정책’이 빚은 결과다. 정부의 게임산업 육성책 ‘부재’가 낳은 게임개발사 ‘부재’는 독일 시장을 외국에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게이머로 하여금 외산 게임타이틀에 눈을 고정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PC게임 강국, 유럽 제2의 게임시장’이라는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이다. 바로 독일의 명암(明暗)인 것이다.

 

 ◆독일 게임계의 뜨거운 감자 ‘게임등급제’

 지난 4월 독일에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북부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학생 총격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독일언론은 사건의 원인을 게임에서 찾았고 1인칭 슈팅게임인 ‘카운트스트라이크’가 총격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종의 훈련프로그램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독일정부도 슈뢰더 총리 주재로 각계 전문가 초청토론을 여는 등 이 게임의 금지여부를 두고 마라톤 회의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문제의 게임이 법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독일오락소프트웨어협회(VUD)에서 ‘게임분야의 자율등급제 도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자율등급제는 업계가 위촉한 각계 전문가들이 게임등급을 정하는 제도로 정부

산하기관이 수행하는 등급제와 구별된다.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의 영상물등급위원회에 해당하는 정부기관인 B.P.J.S에서 1950년대부터 게임, 비디오,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등급판정을 내려왔으나 업계 의견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독일 컴퓨터미디어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크리스토프 할로와티는 “4월에 있었던 총격사건처럼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면 게임회사들은 존립의 위협을 받곤 한다”며 “B.P.J.S에서 내리는 게임등급은 참고사항에 불과한 데다, 비전문적이어서 게임등급에 따라 판매를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한 책임은 고스란히 업체의 몫"이라고 자율등급제 도입 배경을 전한다.

 이어서 크리스토프 할로와티는 “자율등급제가 실시되면 폭력적인 게임의 경우, 취급하는 상점은 대폭 줄어들게 되는 등 일부 게임은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게임개발 방향이 명확해지고 게임유통에서 생기는 혼선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자율등급제는 독일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이르면 내년 상반기경 법적인 효력을 얻을 전망이다.

 

 ◆국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불법복제 문제

 독일이라면 준법의식이 투철한 나라도 통한다. 숫자에 밝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독일의 국민성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국가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독일의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는 의외로 심각한 수준이다. 마이크로소프트 독일 현지법인 이사인 한스 스테트밀러에 따르면 오피스 응용프로그램의 경우 50%, 게임의 경우 70%가 불법복제품이다.

 독일의 1위 PC게임 잡지인 게임스타의 조에르그 랑어 편집장도 독일에서 게임개발사들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이유 중 하나로 불법복제 문제를 꼽았다.

 물론 독일에서의 불법복제는 홍콩처럼 불법복제가 전문화되고 기업화돼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게이머들이 별 생각없이 게임 소프트웨어를 복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국에서 독일법을 참고해 자국의 법을 제정할 정도로 독일법은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만 소프트웨어와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법은 최근에 들어서야 법제화되는 실정이다. 이렇듯 법적 토대가 약한 데다, 독일 국민 특유의 근검절약 정신까지 더해지면서 독일의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는 남부유럽보다는 덜하지만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등 북부 유럽보다는 뚜렷하게 심각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저작권보호위원회 회원으로도 일하고 있는 한스 스테트밀러 이사는 “기업이 나서서 저작권보호를 외치는 것은 지나치게 이윤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어 독일 정부를 통한 정책을 유도하는데 힘쓰고 있다”며 “그러나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독일 뮌헨=정은아기자 eajung@etnews.co.kr 류현정기자 dreamsho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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