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IT문화를 만들자]사이버민주주의 제도개선으로 정착화하자

 지난 11월 30일 오후 6시. 어두워진 광화문 거리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5000여명을 넘는 인파가 침묵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희생된 신효순·심미선양의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였다.

 ‘앙마’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30세의 평범한 회사원이 11월 27일 한 언론사 게시판에 촛불시위를 제안했고 이날 실제로 대규모 시위로 연결됐다. 평범한 한 사람이 대규모 시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의 파급력 때문이었다.

 지난 5월 민주당 경선 과정은 인터넷 정치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정치증권’ 사이트의 인기순위나 신경쓰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것이 고작이었으나 한 후보 진영의 인터넷 활용이 단연 돋보이며 효과를 톡톡히 본것으로 분석됐다. 경선이 끝난 직후 사이버 공간의 정치 폭발이 몰고 온 후폭풍에 관심이 모아졌다. 이처럼 사이버 민주주의 성과로 인정할 만한 사례들이 속속 생겨 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의 황용석 박사는 “인터넷을 비롯한 IT의 급격한 확산에 힘입어 사이버 민주주의는 이상이 아닌 실제가 됐다”며 “IT가 발전한 한국사회에서 사이버 민주주의 시스템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사이버 민주주의는 크게 직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 관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 차원에서는 전자민주주의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선보인 바 있는 전자투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제 선거에서 전자투표를 도입했을 때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된 결과가 도출돼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입힐 수 있다. 나아가서는 국가가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전자민주주의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평가된다.

 두번째로 참여 민주주의 차원에서 정의내리면 절차에 초점이 맞춰지며 일반적으로 사이버 민주주의로 이해된다.

 박동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사이버 민주주의란 인터넷 등 각종 IT가 정치발전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IT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는 총체적인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같은 사이버 민주주의는 공직자와 시민 대중의 직접적인 접촉을 증가시켜 민주주의의 생명으로 평가받는 대표성과 순응성을 한층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각국 정부와 시민단체에서 그 시도를 점차 확대하고 있다. 정부는 과거 획일적인 정책 및 법률의 결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여론 수렴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이버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시민 사회의 활성도가 높고 IT인프라가 잘 갖춰진 미국·핀란드·캐나다 등에서 사이버 민주주의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미국의 미네소타주. 미네소타주의 주민은 ‘일렉트로닉 타운 홀미팅(전자공회)’을 통해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들의 의견을 주정부에 표현할 수 있다. 또 주 정부 관계자는 이를 통해 주민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수렴해 다수 주민의 의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 및 법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전산원의 정연정 박사는 “사이버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식되는 정보의 집중과 독점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을 통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단체가 사이버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시민단체인 ‘프로젝트 보트 스마트’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높이기 위해 참여자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 관심사를 선택하면 이에 적합한 선거 후보를 찾아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초고속인터넷 사용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사이버 민주주의 인프라는 마련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사이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존 제도와 인터넷이 가져온 새로운 현실과의 괴리를 계기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위반으로 대선 후보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사모’ ‘창사랑’ 등을 폐쇄하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특정 후보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각종 토론과 특정 후보에 대한 발언을 선거운동으로 보고 규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는 비판을 듣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노사모 등 후보들의 팬클럽 사이트를 불법선거운동의 온상이 될 수 있는 사조직이라 해서 폐쇄시키려 했다고 치자. 현실 사조직은 폐해가 이미 드러난 예가 있기 때문에 금지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인터넷 사이트는 아직 사조직과 같은 폐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리 규제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란 논리다.

 전문가들은 당장 사이버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선거법을 바꾸는 것은 힘들겠지만 선거가 이번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기에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선관위 서버에 후보들의 사이트를 올려놓고 공정하게 관리하는 방안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법 집행을 네거티브하게 해왔다면 포지티브한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거법 이외에도 정보공개법, 프라이버시보호법, 전자적 협의회제도 등 사이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진보네트워크의 오병일 사무국장은 “사이버 민주주의 정착화를 위해서는 일반 국민이 정부정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중요한다”며 “비공개되는 정보가 너무 많다는 점을 들어 정보공개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종합적인 법률을 만들고 프라이버시 위원회 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관련 법규는 있지만 각종 법안이 분산돼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함께 하는 시민운동의 정보정책팀 김영홍 팀장은 “전자적 공청회를 개최하기 위한 제도 마련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프라인상의 공청회는 시간의 한계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자치단체에서부터 시작해 공청회를 인터넷을 통해 실시하는 방안을 마련해보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동진 고려대 교수도 “전자정부는 민원서비스의 온라인화에 불과하다”며 “지방 자치단체들은 기술을 시스템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시스템화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이것이 반영이 되는 등 시민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지난 20세기에는 정치 후진국으로 오명을 남겼지만 사이버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면 21세기에는 정치 선진국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정부, 시민단체 그리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제도 개선부터 시작하자는 데 여론이 높다.

[인터뷰]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 

 “의견 수렴 측면에서 볼때 국내 네티즌의 참여가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기성 제도권이 따라주지 못해 꽃을 피기도 전에 사그러드는 경우가 많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른 시일내 제도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은 국내 사이버 민주주의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처럼 인터넷상에서 활발하게 의견개진이 일어나는 나라는 드물다는 것이다.  

 민 소장은 “산업화시대에 정치 후진국이었다면 다가오는 정보시대에는 정치 선진국으로 성장해야 한다”며 “사이버 민주주의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기에 다양한 연구와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사이버 민주주의의 효용성은 무엇인가.  

 ▲사이버 민주주의의 효용성은 크게 △정치 참여의 확대 △정치과정의 효율성(고비용 저효율→저비용 고효율) △정치과정의 투명성(온라인의 개방성 및 정보접근 가능성 용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사이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이런 세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기존 제도의 개선 혹은 새로운 제도 마련에 나서야 한다.

 ―국내 사이버 민주주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기존 사이버 민주주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 모델로 구분지을 수 있다. 첫째가 전자투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즉 전자토론 두가지 모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새로운 모델을 지속적으로 양상하고 있다. 노사모, 창사랑과 같은 팬클럽 등 커뮤니티형 모델이 나오기도 하고 정치인들에 대한 인지도를 여론조사로 보여주는 정치 관련 사이트도 출현하고 있다. 이처럼 실용적인 측면에서 좋은 모델이 나오고 있지만 제도화된 정치과정에서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시대에 맞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현실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제도가 자꾸 옷자락을 잡고 뒤로 당기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으니 선거법을 예로 들어보자. 선거법의 각 규정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선거법의 적용원리가 바뀌어야 한다. 기존 선거법 적용방식은 ‘할 수 있는 것을 명시하고, 법 조항에 명시되지 않은 일체의 행위는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인터넷을 활용해 할 수 있는 것은 국한돼 있어 인터넷상의 선거관련 행위는 대부분 불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을 명시하고 그 밖의 모든 행위는 할 수 있다’는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그래야 사이버 민주주의가 빨리 도입될 수 있다. 네티즌들의 성숙한 의식도 병행돼야 한다. 남을 비방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모색하고 함께 논의한다는 자세로 사이버 토론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버 민주주의를 연구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일단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이 힘들다. 또한 제도를 직접 고칠 수 있는 분들의 참여가 아직까지는 미미해 구체적인 연구가 힘들다. 예를 들어 선거법의 개정을 논할 때 사회학자, 정치학자, 법학자 등 제도개선을 추진할 수 있는 분들의 관심이 아직까지는 부족하다. 당위성과 효용성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각론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이 부족한 셈이다.

 

<이병희기자 shake@etnews.co.kr

  박지환기자 daeba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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