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와 포커. 1년 12달을 상징하는 벚꽃·난초·목단·국화·단풍무늬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화투는 동양인이, 스페이드·다이아·하트·클로버 무늬로 장식된 포커는 서양인이 즐기는 놀이기구다.
인간 고유의 사행심을 자극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울리고 웃긴 화투와 포커게임은 룰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화투는 아무리 판세가 나빠도 그 판이 종료될 때까지 가야하는 반면 포커는 판세가 불리하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든지 빠져 나올 수 있다.
미세한 것 같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임의대로 손을 뺄 수 있으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손을 빼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손실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대표하는 놀이기구에서 나타나는 문화차이가 벤처 투자에서도 그대로 재연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투자했던 기업의 미래가 불투명하면 투자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곧바로 청산절차에 들어가지만 한국에서는 투자했던 기업이 문을 닫을 때까지 밀고 나간다.
한마디로 ‘못먹어도 고’다. 이러한 책임회피식 투자관행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나다. 지난 99년 닷컴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창투사들이 불과 3년여만에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주 요인은 코스닥시장 침체, 벤처경기 위축, 경제전망 불투명 등 악재가 중첩되고 로크업(주식매매 일정기간 금지)에 묶여 기업공개(IPO)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된 투자행태가 일조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경제의 상징이던 벤처가 고사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불황 장기화와 IT산업 침몰 여파로 창투사 등 국내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벤처기업의 상징인 강남 테헤란밸리는 불이 꺼진지 오래고,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던 코스닥시장은 개장(96년 7월 1일) 이후 최대 위기를 맞으면서 벤처자금의 젖줄에서 자본시장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대로가면 벤처투자→기술개발→상용화→재투자로 이어지는 산업생태계 시스템(Industrial EcoSystem)도 무너질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위기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 IT산업의 심장인 실리콘밸리에도 대대적인 감원열풍이 몰아치는 등 매출 및 투자금액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미 실리콘밸리 소재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VC)의 상반기 투자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고, IT기업의 혁신을 이끌어온 연구개발(R&D) 투자도 사상 최대폭으로 감소했다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시중에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뭉칫돈이 몰려 다니고 있다. 이 돈의 물꼬를 벤처로 돌려야 한다. 물론 등록기업의 낮은 수익성과 대주주의 도덕성 부족에 따른 신뢰성 상실로 벤처의 ‘벤’자나 닷컴의 ‘닷’자만 나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투자자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벤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옥석가리기를 통해 속빈 강정을 추려내야 한다. 그래야만 바닥으로 떨어진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고 우량 벤처로 자금이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벤처산업을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부의 벤처지원정책도 직접지원에서 간접지원(우수인력 육성·인프라 구축·건전한 금융환경 조성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코스닥시장의 질적 건전성을 높이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벤처금융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등록요건의 강화와 같은 양적 규제보다는 투자적격성이 떨어지는 기업은 곧바로 퇴출시키는 질적 규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벤처산업의 체질강화를 통해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박광선위원 ks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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