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신인류가 달린다-우리는 멀티플레이어

‘한 우물을 파라.(그래야 더 깊이 팔 수 있다.)’

 먼 과거, 사람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순간부터 성공을 위한 첫 번째 필수요건으로 거론됐던 문구다.

 하지만 21세기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 문구가 정답만은 아니다.

 능력 있는 그리고 자기관리에 충실한 IT신인류인들은 ‘한 우물을 파라’는 선인들의 말에 결코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두 개의 우물을 파라.(그래야 하나가 막히면 다른 곳에 기대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다.

 이들이 바로 ‘투잡스(Two Jobs)’족이다.

 △엄재경(35)-만화 스토리작가 겸 게임 해설가

 ‘엄재경씨, 원고 마감했죠. 늦어도 오늘 안에 보내주셔야 합니다.’

 17일밤 11시. 게임전문 케이블방송사인 온게임넷에서 게임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엄재경씨가 4시간여의 긴 방송을 맞추고 휴대폰을 켜는 순간 들어온 메시지다.

 엄재경씨는 속으로 되뇐다. “앗! 오늘이구나.”

 그리고 사투를 함께 벌였던 스태프들에게 무뢰함을 뒤로하고 “죄송합니다. 저 먼저갑니다”라는 외마디를 지르고 바로 집으로 달려간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넘긴 12시 20분.

 이때부터 또 다른 직업의 시작이다. 씻는 둥 마는 둥 세안을 하고 바로 펜을 들고 원고를 써 내려간다. 그리고 아침해가 뜰 때쯤이면 원고는 마감된다.

 엄재경씨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희망대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대기업에 입사했다. 일주일 후, 대기업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지기 시작할 시점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꿈꿔왔던 만화 스토리작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스토리작가로 활동하면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틈틈이 즐겼던 게임이 어느새 프로의 실력으로 향상됐고, 우연한 계기에 방송국에서 해설자로서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엄재경 해설가 겸 작가는 투잡스족인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만화작가와 해설가. 모두 프리랜서 직업으로서 자신의 일정·건강 등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때론 고통으로 다가오고 또한 일을 같이 하는 주변 사람들과 충돌할 소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람도 그만큼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경목(30)-회사원 겸 파티플래너

 단국대학교 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이경목씨는 두 개의 명함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스카이라이프 웨이브TV 전략사업팀 과장, 또 하나는 파티를 기획하는 파티즌사의 대표.

 그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두 가지 직종도 모두 사람과 만나서 해결하는 것이다.

 이경목씨의 하루는 물론 웨이브TV 전략사업팀의 과장으로 시작한다. 웨이브TV로 출근한 이경목 과장은 아침 출근과 함께 전화기를 든다. 업체 사람들과 만나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발하거나 기획해 제휴 네트워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을 바쁘게 만나러 돌아다니고 나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진다.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부터는 파티즌사의 대표로 활동할 시간. 회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밤거리를 누빈다. 업체에서 의뢰한 파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 청담동·압구정동·신촌 등지의 카페와 연회장 등을 둘러본다. 의뢰한 업체를 방문해 관계자들과 파티 진행방식 등에 대해서 회의를 하기도 한다.

 주중에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멀티플레이어지만 주말에는 파티플래너로 집중한다. 매주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매달 2∼3회 열리는 파티를 위해 아침부터 파티장으로 직행해 하루를 보낸다. 주말이 따로 없는 것이다. 남들은 주5일 근무라는데 이경목씨는 한달에 2∼3일 정도밖에 쉬지 못한다. 하지만 이경목씨는 결코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다.

 “남들은 귀찮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저는 사람 만나서 명함을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며 일을 착착 진행해 나가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일을 여가처럼 즐기는데 따로 주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홍순율(33)-교사 겸 여행전문가

 ‘주중에는 교사, 주말에는 여행전문가.’

 홍순율씨는 자신을 역마살이 낀 사람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날때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국내 이곳저곳을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다. 이런 그의 습성은 결국 그를 여행전문가로 만들었다. 현재는 한국여행작가협회의 일원으로 한국관광공사의 ‘관광지 안내’ 홈페이지를 감수하고, 또한 여행전문가로 불교방송과 여행관련 잡지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글을 기고하고 있다.

 홍순율씨의 생활이 다른 투잡스들과 다른 점은 주중과 주말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

 주중에는 철저하게 교사다. 아침에 출근해서 학생들과 보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주말에 해야 할 일을 한다. 늦게 퇴근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말은 무조건 시간을 비워둔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교사라는 직업은 잠시 사라지고 여행전문가로 탈바꿈한다. 거의 매주 토요일에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옷을 갈아입고 목적지로 출발한다. 좀 멀리간다 싶으면 토요일 밤 심야버스에 몸을 싣고 다음날 일요일밤 심야버스로 월요일 새벽에 돌아와 바로 학교로 출근한다.

 이렇게 타이트한 일상 때문에 홍순열씨는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를 해본적은 한번도 없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합니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kr>

 

 ■인터뷰: 잡코리아 김화수 사장 topmost@jobkorea.co.kr

 “경기불황에 따른 명예퇴직 등 구조조정을 경험한 직장인들이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동시에 더욱 부를 많이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투잡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는 주5일 근무에 따른 짜투리 시간 증가로 더욱 확산될 추세입니다.”

 온라인 리크루팅업체인 잡코리아의 김화수 사장은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투잡스족이 일시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트렌드로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잡스족이 늘어나고 있는 배경은.

 ▲IMF 이후 고용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평생직장’보다는 ‘평생직업’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아울러 창업이나 기타 부업을 통해 생활의 안정을 찾으려는 직장인이 생겨났고, 이는 투잡스족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또한 주5일 근무제 확산에 따른 여유시간이 늘어난 직장인들이 취미와 병행할 수 있는 투잡스나 주말을 이용한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여기에다 올들어 유행하고 있는 ‘금전만능 풍조 확산’도 하나의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투잡스족의 유형을 소개하면.

 ▲크게 창업형·취미형·프리랜서형·부업형 등으로 구분된다. 창업형 투잡스족은 구조조정 등에 대한 불안감으로 새롭게 창업에 뛰어든 사람들로 젊은층은 온라인 쇼핑몰이나 인터넷을 통한 주문제작업 등을, 중년층은 호프집이나 아이스크림 전문점 등을 개업한다.

 취미형 투잡스족은 자신의 취미를 살려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늘고 있다. 프리랜서형 투잡스족은 취미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아 전문가 수준의 특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며, 부업형 투잡스족은 낮에 일하는 회사와 밤에 혹은 주말에 일하는 회사가 다른 두 개의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투잡스족들이 겪고 있는 애로점은.

 ▲두 가지 일을 하다보니 건강을 해치거나 하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창업형 투잡스의 경우 본업에 투자하는 시간 동안은 아르바이트를 쓰는 등 다른 인력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대비 수익이 넉넉지 않을 수도 있고 실패의 가능성도 높다.

 ―투잡스족이 계속 늘어날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은 자의건 타의건 두 가지 직업을 통해 안정되고 여유있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또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투잡스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결국 앞으로도 노동시장의 유연화, 새로움에 대한 추구, 능력에 따른 자기실현 등의 경향으로 투잡스 시대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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