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라는 기차의 맨 뒤칸에 겨우 올라타 수많은 길고 긴 시행착오를 거치며 겨우 1등칸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려하고 멋진 환영행사가 아니다. 너무나 생소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디지털혁명, 정보화혁명의 바람이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에겐 모방하고 답습할 벤치마킹 대상도 없다. 오로지 새로운 아젠다로 무장하고 올곧은 도전정신으로 나와의 고독한 싸움을 펼쳐야 한다.
세계 경영인들의 금과옥조로 여겨져온 미국식 경영이 도마위에 올랐다. 에너지기업 엔론과 통신기업 월드컴의 부정회계 파문은 주주이익과 투명성을 자랑하는 미국식 경영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다. 특히 월드컴 CEO 버나드 에버스의 후안무치한 보수문제는 세계적 명성을 누려온 많은 스타 경영인이 도덕적인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그 대열에는 GE의 전 회장 잭 웰치도 끼어있다.
주주이익을 위해 최대한 봉사하고 그 대가로 엄청난 부를 챙겨온 미국식 경영체제는 CEO들이 지나치게 단기성과에 연연, 부정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분석도 빠지지 않는다.
반면 종신고용을 최대의 무기로 세계 제조산업의 심장으로 군림해온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하루에도 몇천명씩의 근로자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해온 거대기업간 제휴와 협력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또다른 한편에서는 컨베이어벨트를 없애고 숙련공이 수작업으로 제품을 조립하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고 제조를 전문업체에 아웃소싱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공장없는 회사를 꿈꾸는 R&D 전문회사도 생겨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21세기 디지털혁명 물결속 한가운데 놓여있는 모든 기업들은 노아의 방주 신세다.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거대한 홍수가 과연 일엽편주와 같은 노아의 방주를 어디에 귀착시켜놓을지 누구도 모른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 93년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아젠다를 제시, 오늘의 애니콜신화를 이룩해냈다. 또 올해는 “잘 나갈때 10년 후를 대비하라”는 특명을 내려 10년 후의 비전과 전략을 짜내기에 여념이 없다.
비록 미국기업들이 부정회계로 얼룩졌지만 기업의 투명성은 영원한 아젠다다. 그러나 주주의 이익을 위해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미국식 경영의 단점은 극복돼야 하는 과제다. 종신고용의 일본식 경영과 총수를 정점으로 장기적인 경영방식을 추구하는 일본식, 한국식 경영체제도 그 대안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변화에 미온적인 일본식이나 문어발식, 족벌식으로 대변되는 투명성이 결여된 한국식은 극복해야 될 또 하나의 숙제다.
아무리 미국식 경영이 도마위에 올랐지만 투명성과 신속한 변화적응력, 위기관리력, 기술선도력은 한국기업이 수용하고 익혀야 할 과제다. 그러면서도 단기성과에만 연연하지 않고 장기비전을 세우고 줄기차게 추진하는 뚝심있는 한국만의 경영 장점도 동시에 살려내야 한다.
일선 경영현장에서는 컨버전스, 컬처, 크리에이티브, 커스터머베이스로 불리우는 소위 4C경영이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혁명기에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담보해내기 위한 아젠다다. 전통의 영역에 안주하다가는 언제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 컨버전스를 통한 새로운 창조와 혁신만이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범이다. 기성복시대가 사라지고 있다. 고객관계관리(CRM)를 바탕으로 하는 고객 중심의 경영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디지털시대에는 소비자도 집단이 아닌 개체로 해체되고 있으며 개별 맞춤식 특별 서비스만이 이들을 붙잡을 수 있다.
이젠 개성과 문화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상품이다. 70년대는 히피족이, 80년대는 여피족이, 90년대는 딩크족이 새로운 사회문화를 이끌었다면 21세기초에는 보보스족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다. 히피족이 철저히 탈자본주의적이었고 여피족과 딩크족이 자본주의 탐닉족인 반면 보보스족은 자본주의와 탈자본주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지 소비를 자아만족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기성의 질서를 철저히 배격한다. 이들에겐 기업의 이미지, 상품의 이미지가 관건이다. 품질향상과 생산성 향상만으로는 보보스족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도전과 응전은 인류발전의 원동력이다. 20세기 인류사회의 근간으로 산업사회의 꽃을 피웠던 기업들은 21세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아젠다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응전하는 자만이 정보사회의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 <유성호기자 shyu@etnews.co.kr>
■IT산업 5대 키워드 ■
국내 정보기술(IT)업계가 기로에 섰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90년대를 마감하면서 도약이냐 후퇴냐의 갈림길에 맞닥뜨린 것이다.
2000년대 들어 IT의 성장을 견인했던 인터넷의 버블(거품)이 걷히면서 업계는 추진력을 잃어가고 있다. 성장을 멈출 것 같지 않던 신경제 효과도 퇴색했다. 90년대의 고성장은 IT 공급과잉을 낳았고 기업들은 IT투자를 중단했다. 자연스레 IT시장은 위축되고만 있다.
IT업체들은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돌파구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닷컴기업들이 연쇄도산으로 문을 닫고 탄탄한 수익성을 자랑하던 유럽의 이동전화사업자들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급기야 IT가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얘기마저 나오기에 이르렀다.
국내 IT업체들도 사정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SK텔레콤 등 일부 거대기업들이 사상최고의 실적을 갱신하고 있지만 대다수 업체들은 IT불황으로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IT산업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돼 균형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향후 전망도 밝은 편이 아니다. 중국·대만 등 후발국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강점으로 세계시장에서 한국을 위협하고 있고 미국·일본 등 선발업체들은 브랜드와 기술력을 앞세워 진입장벽을 높이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한국은 IT시장에서 경쟁력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어찌됐든 산업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한국은 이미 정보강국의 반열에 올라있다. 우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미래시장을 정확하게 예측만 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 사실상 표준과 시장을 주도하는 CDMA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밀어주고 기업들은 연구개발과 상용화에 주력, CDMA 신화를 만들 수 있었다. 앞으로도 아이템만 잘 발굴해 육성한다면 승산은 얼마든지 있다. 반도체나 이동전화단말기처럼 말이다.
먼저 향후 한국을 먹여살릴 품목을 찾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핵심 트렌드와 이에 따른 키워드를 찾아야 한다. 업종을 불문하고 기업들이 성공을 위한 비전을 세우는 데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안을 중심으로 말이다. 본지는 △중국 △글로벌과 로컬 △디지털융합 △모바일 △벤처 등을 향후 20년간 국내 IT업계가 주목해야 할 5대 키워드로 제시한다.
이들은 향후 산업환경 변화와 관련된 핵심 변수다. 때로는 이들 키워드가 서로 겹치면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기업과 시장의 흐름을 좌우할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변수를 설정하고 이에 맞는 대응력을 기르는 것은 미래의 도전을 위한 첫걸음이다. 핵심 변수를 고려한 기업경영만이 실패의 가능성을 줄여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우리 기업들의 고려사항 제1번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침체 속에도 ‘나홀로’ 독주중이다. 13억명의 내수시장과 막강한 화교 네트워크를 이용해 매년 10%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세계 최강의 업체들이 속속 진출하면서 IT 올림픽 경기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시장에 발붙이기조차도 힘들다. 올해는 한중수교가 체결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을 발판으로 한국 IT산업이 한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광속의 시대에선 더이상 우물한 개구리로는 통하지 않는다. 세계화와 현지화를 동시에 병행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현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글로벌화는 더이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고 세계적인 브랜드도 만들어야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이제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만족하지 말고 아예 안방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컨버전스는 더이상 기술의 융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기업과 경제환경도 컨버전스화되고 있다. 기술과 기술, 제품과 제품이 융합돼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품을 생산하다간 퇴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마인드를 가진 최고경영자(CEO)가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모바일이다. 통신과 컴퓨팅 환경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기업내 인프라는 물론 가정까지도 모바일 물결이 몰아치고 있다. 모바일 워커족, 모바일 오피스 등 신조어마저 등장하고 있다. 모바일이 문화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에 관한 한 한국이 세계 최고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한국 벤처는 최근 2년여 동안 천국의 꿀맛과 지옥의 쓴맛을 함께 경험했다. 벤처정신 없이 무늬만 벤처인 곳도 적지 않았다. 헝그리 정신과 기술력으로 똘똘 뭉친 새로운 벤처가 필요하다. 기업뿐 아니라 산업과 국가도 변화에 익숙한 벤처가 돼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이 생긴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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