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새로운 20년-차세대 국가비전 필요하다

 ‘국가 비전의 부재’.

 지난 세기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국가비전이 마련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도가 국가의 미래을 어림해 볼 수 있는 척도의 전부였다. 빈약한 천연자원, 협소한 국내시장, 취약한 산업기반은 ‘빈곤의 악순환’을 야기시켰고, 그 속에서 장기적인 국가비전을 세울 만한 여력이나 의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제대로 된 국가 청사진이 필요한 시기가 됐다. 세계 12위의 수출대국인 우리의 경제적 위상은 세계무대에서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은 이미 WTO, OECD 등 주요 경제기구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된 상태며 1인당 국민소득도 1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국가 장기비전 수립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박약하다. 지난 70∼80년대 근대화 초기부터 ‘5개년’ 계획에 익숙해 있는 정부 각 부처는 10년에서 길게는 50년 앞을 내다봐야 할 국가의 장기 프로젝트 수립에 호흡이 긴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긴 안목과 호흡을 갖고 인재 양성, 인프라 조성 등 중장기 계획을 마련해야할 과학기술 분야마저 ‘과학기술기본계획법’에 의거, 5년 단위의 단기 계획만 수립하는 것이 명문화돼 있다. 국가 과학기술의 장기 비전제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아예 법제화된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재정경제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중심이 돼 다만 10년 후 국가의 청사진을 조망해 보자는 ‘비전 2011’ 프로젝트가 시도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인 국가 장기 비전 프로젝트로는 첫 작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전 2011은 몇몇 쟁점사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렵사리 나온 최종 보고서도 실제 정책입안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같은 시도 자체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올바른 국가 미래 수립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비전 2011 이후 제시된 한나라당의 ‘국가혁신 보고서’나 한국의 헤리티지를 표방하며 각계 저명인사 500여명이 참여해 출범한 ‘미래포럼’ 등은 정치색을 띠고 있기는 하나 이는 미래 국가비전에 대한 사회적 욕구의 반증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 하수도 정비사업 하나에 40년을 계획하고 준비해왔다. 가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언제 정권이 바뀔지 누가 장·차관으로 올지 모른다고 해서 더이상 국가비전 수립에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

■KDI `비전 2011`엔 무슨 내용 담겨있나 ■

‘열린 세상, 유연한 경제’라는 주제하에 1년여의 작업을 거쳐 지난해 말 첫선을 보인 ‘비전 2011’은 10년 후 대한민국의 미래비전과 이를 위한 쟁점과제를 경제 분야별로 총괄해 다루고 있는 일종의 국가 청사진이다.

 재정경제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공동 총괄로 진행된 비전 2011 프로젝트는 성장동력반, 지식정보반 등 16개 작업반에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을 비롯한 16개 연구기관과 재경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등 관련 정부부처가 총망라돼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당초 성장동력반에 함께 편재된 산업자원부와 정통부는 IT, e비즈니스 분야 등 일부 현안에 대해 첨예한 대립을 보여 결국 정통부는 지식정보반이라는 별도 작업반으로 나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8개월에 걸친 작업기간중 모두 36회의 쟁점토론회에 연인원 290여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 불확실한 미래의 여건 변화에 유연한 대응 시스템을 확립한다는 데 최우선 역점을 두고 비전제시 작업에 임했다.

 그 결과 지난 2월 최종 보고서 형태로 나온 비전 2011에는 15개 부문에 걸쳐 총 100대 주요과제와 과제별 세부사항들이 제시돼 있다. 이 가운데는 산자부의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 근간이 된 ‘외국기업 유치를 통한 혁신능력 배양’과 지난 6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방 벤처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 보고서의 핵심 모티브가 된 ‘중소기업정책의 지방분권화’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추진될 때만 해도 각계의 많은 지원과 관심을 모았던 비전 2011은 기대만큼 이렇다 할 실천모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최종 보고서가 나올 당시 진념 전 부총리는 “이번 보고서가 정부의 중장기 정책 수립에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힘을 실어줬으나 정책입안 일선에서 비전 2011의 활용도는 미미한 수준이다. 특히 비전제시의 시점이 정권말기라는 ‘태생적 한계’는 정책당국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KDI는 차기정권용 청사진 작업에 착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KDI내 장기비전팀은 이미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의 발전비전’ 등 일부 프로젝트를 차기정부 제안용으로 분류, 연구작업에 착수했다.

■인터뷰: 김중수 KDI원장 ■

“주변 환경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비전’의 중요성은 강조됩니다. 이제 막 외환위기를 벗어난 우리 경제에도 구조적 불안요인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와 성찰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시기인 셈이죠.”

 올 초 국가의 10년 후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실천과제와 대안을 담은 ‘비전 2011’ 보고서를 내놓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중수 원장(56)은 지금과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시기야말로 ‘비전’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때라고 말했다.

 김 원장을 통해 국가 장기비전과 정보기술(IT), 생명기술(BT), 나노기술(NT) 등 한국의 차세대 성장동력에 대한 견해 등을 알아본다.

 -KDI의 비전 2011 보고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과거 국책과제로 진행돼온 비전작업은 장밋빛 미래의 모습과 정부의 중장기 정책목표나 과제의 제시에 주력해온 게 사실이다. 반면 비전 2011 프로젝트는 우리가 안고 있는 장애요인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과정에서 각계의 많은 목소리와 서로 다른 이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는 소모적 논쟁이 아닌 정책개발 작업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기 위한 소중한 투자다. 비전 2011은 미래의 청사진을 사회 각 구성원이 어떻게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제들을 또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자 물음인 셈이다.

 -산업자원부 등 각 정부부처는 나름의 장단기 비전과 과제를 내놓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비전 2011은 자칫 ‘옥상옥의 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각 부처의 계획을 한 데 아우르는 이른바 ‘메가플랜’이 필요성도 대두되는데.

 ▲주요 부처들이 각자의 부문에 대한 종합계획이나 비전을 마련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같은 세부계획을 필요로 할 만큼 발전·진화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부처 이기주의, 계획간 상충 등은 비전 2011과 같은 종합적 비전의 틀 안에서 조율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자고 예산권과 정책기획권 등이 통합된 이른바 ‘메가플랜’을 수립한다는 것은 부작용의 우려가 앞설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존 정책협의·조정 기구의 기능을 통해 각 부처 계획의 중립성과 보완성을 최대한 보완하는 게 바람직하다. 예산부처가 적극 참여해 협력·조정기능이 살아나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인적자원개발회의 등이 좋은 예다.

 -들인 공에 비해 비전 2011 보고서가 실제 정책수립 과정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 보고서의 바람직한 활용방안은 무엇인가.

 ▲현재까지 추진이 미흡한 과제는 주로 ‘쟁점성 과제’로 파악된다. 이는 어차피 중장기 과제인 만큼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사안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토론과 사회적 합의형성 노력을 거친다면 비전 2011은 소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차기정부를 위한 후속 비전작업도 준비중인가.

 ▲정권에는 임기가 있으나 정부에는 임기가 없다. 비전 2011은 최대한 객관적인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차기정부를 위해 또다른 종합보고서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개선하고 보완돼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검토가 이뤄질 것이다.

 -IT, BT, NT 등 차세대 성장동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의 과제는 이들 신기술을 실용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체제의 혁신이 필요하다. 특히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국가연구개발체제, 산학연 연계체제 등이 일선 산업계의 수요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고 본다. 기초연구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라 하더라도 이같은 시각을 견지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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