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남 여성벤처협회장
최근 몇년새 한국 벤처기업들이 엄청난 고통과 시련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지난 98년부터 2000년까지만 해도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벤처열기가 식으면서 웬일인지 벤처기업과 벤처인들에 대한 언론과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게 바뀌어 갔다. 최근 들어 벤처산업이 한국경제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이를 단지 머니게임(money game)으로 다시보게 됐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벤처인으로 위장한 모리배들이 꾸민 각종 비리사건이 최근 불거지면서 건전한 벤처기업과 기업인들까지 모욕과 비난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이런 업계의 형편은 곧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해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벤처’는 말 그대로 위험을 안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는 기업형태다. 미국 사례를 보면 아이디어만 가지고 회사를 설립한 벤처기업 중 불과 5%만이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아서 장기적으로 생존한다. 창업한 뒤 7∼8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미국과 한국 벤처환경을 비교해 볼 때 눈에 띄는 점은 미국의 벤처기업들은 투명한 산업환경에서 설립돼 성장하며 사업 아이디어나 기술이 시장에서 인정받는 상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벤처캐피털들이 자본을 충분히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또 이들 벤처캐피털은 투자한 벤처기업이 성공적인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지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 전문 CEO를 추천해 그 회사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 제도를 똑같이 도입하기에는 국내 벤처산업이 아직 덜 성숙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벤처 위기’라고 불리는 시기인 바로 지금이 한국 벤처산업의 생태계를 변화시켜야 할 시점이 아닐까.
벤처업계의 전화위복을 염원하며 국내 벤처생태계를 바꾸기 위한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정부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벤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책으로 벤처산업과 관련한 모든 법규, 규정, 행정지침 등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 제도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가야 한다. 둘째, 사업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을 뿐 자금력이 부족한 벤처기업들에 대한 자본공급을 보장하는 지원책이 수립돼야 한다. 창의력 있는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아 누군가가 투자를 한다고 할 때 이들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성공하여 시장에 나올 때까지 자본공급을 꾸준하게 보장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벤처기업들은 ‘투자’가 아닌 ‘빚’으로 운영돼 왔고 이는 결국 기업의 신용도를 낮추게 돼 필요한 때에 돈을 빌릴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 됐다. 이런 악순환 고리를 깨기 위해서 충분한 자본공급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셋째, 벤처기술에 대한 투명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모든 외부로부터의 ‘유혹’을 차단시켜야 한다. 정말 뛰어난 아이디어, 기술이 공정한 평가를 받고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넷째, 벤처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위해 성공한 대기업과 주변 업계,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야 한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공동으로 사업화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합작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기업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벤처인 스스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벤처자금은 오직 벤처를 위해 써야 한다’는 벤처인들의 인식과 각오가 있어야만 기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 기업, 정부 등 벤처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신뢰를 바탕으로 현재 벤처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성공적으로 바꿔 나갈 때 생태계는 나아지고 벤처인들이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한국 경제의 우등생’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지난 7월 24, 25일 이틀간 한국벤처협회와 한국여성벤처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섬머스쿨(summer school)은 모처럼 벤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 벤처산업의 문제점에 몰두했던 자리였다. 이 자리를 마치며 참석한 벤처기업인은 물론 벤처산업을 아끼는 대기업 전문경영인과 정부 관료, 대학 교수들이 맺은 결론은 각자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벤처업계 모두의 힘을 모아 ‘한일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응집력을 세계시장에 다시 한번 펼쳐 보이며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 국가로 한국이 도약하는데 뜻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yn@ezdg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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