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65)치우천황의 부활

글 쓰는 재미 중 하나는 새로운 끄나풀을 잡고 그것을 차근차근 쫓아가는 일이다. 우연, 혹은 감각으로 잡은 끄나풀이 처음에는 짧고 작게 보이다가 쫓아갈수록 그 길이가 길어지고 타래가 커지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그 재미 또한 함께 커지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치우천왕(蚩尤天王).

 지난번 칼럼에서 쓴 치우천왕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붉은 악마의 깃발을 소개하기 위해 잡은 끄나풀이었지만, 쫓아가면서 그 길이와 타래의 크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만큼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치우는 단순히 붉은 악마가 응원하면서 흔드는 깃발이 아니라 우리 역사이며, 우리 민족혼과 밀접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많은 자료를 검토하면서 단군보다도 300여년 앞서 존재했던 치우천왕의 존재에 대한 규명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고 정립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치우천왕의 형상을 통해 그 무엇보다도 용이하게 신화를 역사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신라시대의 기와조각에서, 엄마가 붙여놓았던 문설주 위의 부적에서, 아직도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장승의 모습에서 만날 수 있는 무서운 형상. 그러나 웃음을 머금은 그 모습이 바로 치우천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치우천왕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많이 등장한다. 때문에 그 내용도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주 힘이 강하고 싸움을 잘한다는 것과,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뿔이나 있다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치우를 기록하고 있다.

 “…이 때 헌원(軒轅)이 무력으로 제후들을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琢鹿)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또한 사기의 ‘집해(集解)’ ‘색은(索隱)’ ‘정의(正義)’에는 여러 고서들을 인용하며, ‘치우는 옛 천자(天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며 몹시 사나워 천자가 될 수 없다’는 등 엇갈리게 기록되어 있다. 또 ‘치우는 형제가 81명 있었는데 몸은 짐승이나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있으며, 모래를 먹고 산다. 오구장(五丘杖)·도극(刀戟)·태노(太弩)를 만들어 사용하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를 비롯한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치우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어리석은 임금, 또는 하찮은 벌레같은 임금으로 폄하하고 있다. 청동제 투구와 갑옷, 칼과 청동 무기를 사용하는 힘센 반역이며, 모래를 먹는 괴물로 치부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고서에 나타나는 치우천왕에 대한 이미지는 강하고, 천지를 뒤흔든 무적의 장수로 등장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태시기(太始記)에는 ‘환웅천왕이 신시(神市) 나라를 다스릴 때 치우 장수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게 하였는데, 치우는 실로 만고의 뛰어난 강용지조(强勇之祖)이었다. 하늘을 빙빙 돌면서 바람과 구름과 번개와 안개를 능히 부리고, 칼·창·활·도끼·장창 등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으며, 모든 벌레나 잡귀들을 쳐부수고 나라를 지키는 장수(匠帥)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단고기’의 ‘삼성기(三聖紀)’에는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누리를 다스릴 수 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천왕에 대한 시각은 다를지라도 그 강함은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황제와 73회를 싸워 모두 승리했고, 중국에서조차 전쟁의 신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도 치우천왕에게 절을 올리고 전쟁에 나섰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중국의 황제에게 잡혀 다섯 토막이 나서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죽음조차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명쾌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축구경기와 붉은 악마의 응원을 통해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지금까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던 힘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전혀 새로운 강력한 힘의 존재에 그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의 그 힘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창과 칼로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치우천왕이 부활한 모습이었다. 선수와 응원단을 통해, 우리민족을 통해 부활한 치우천왕의 모습에 대한 반응이었다. 기준이고 중심이었던 기존 질서에 대한 힘센 반역으로, 자율화되고 정열적인 힘의 모습이었다.

 또한, 치우천왕에 대한 기록 중 일관되게 나타나는 내용 하나는 모래를 먹고 산다는 것이다. 모래는 규사 성분을 포함하고 있고, 규사는 바로 정보기술(IT)산업의 주요 부품이 되는 반도체의 기본 소재가 된다. 여기서, 치우천왕이 모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과 IT산업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월드컵 개막식 행사의 디지털 광대와 IMT2000 시연, 언제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정보통신 인프라, ‘HDS 시연관’ 개관, IMT2000을 통한 국제영상통화 서비스 시연은 우리나라 IT분야의 힘의 과시였다. 그것은 IT분야 치우천왕의 모습이었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준 제시였다.

 이번 월드컵 기간중 많은 외신기자들이 우리나라의 IT투어에 참여했다. ‘IT코리아’를 확인하게 하는 행사였다. 특히, 시간과 장소, 디바이스와 솔루션을 통합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장치로도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지털 라이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축된 ‘HDS 시연관’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HDS 시연관’을 방문해 실제로 ‘IT코리아’를 체험한 외신기자들은 축구와 응원에서 받은 충격과 같은 충격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일반 이동전화와 개인휴대단말기(PDA)를 통해 직접 가정의 모든 가전기기를 제어할 수 있고, 가정 곳곳을 모니터할 수 있는 시연 시설을 상용서비스로 구축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용서비스로 시연관을 구축할 수 있는 나라는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HDS 시연관’을 분당이 아닌 전국 어느 곳에 옮겨놓아도 상용서비스로 운영이 가능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그 이전, 시연관시스템의 네트워크를 상용서비스로 구축하겠다는 그 생각 자체가 외국인들에게는 투구를 쓰고 나타난 치우천왕의 모습처럼 강한 존재로 보여졌을 것이다.

 역사속에서 존재하던 치우천왕이 그 빛 붉고, 그 함성 요란하게 현실로 부활했다. 월드컵은 부활을 위한 제의였고, 모든 미디어는 부활을 확인해주는 도구였다. 5000년을 우리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다 부활한 치우천왕은 이제 세상을 통합하고 조율하고자 하는 우리민족의 자신감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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