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26)구멍뚫린 자격증 제도

S여대 대학원생인 K씨는 요즘 정보처리기사 자격시험 준비에 한창이다. 올해 마지막 시험일자가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수학 전공의 K씨가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에 욕심을 내는 이유는 대학원 졸업 후 정보기술(IT) 업종에 취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올해말 실시 예정인 서울시 공립중등학교 교사 임용시험에서 가산점을 받기 위해서다.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획득할 경우 교사임용시험에서 가산되는 점수는 3점. 시험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점수다. K씨는 이미 수년 전 같은 목적에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과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딴 바 있다. 하지만 가산점이 1점에 불과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획득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K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자격증 취득을 시험합격을 위한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다. 통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연간 수만장의 자격증이 IT 전문인력 양성의 목적이 아닌 가산점 획득의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IT자격증을 포함한 기타 자격증은 가산점 획득의 수단으로 명성이 높다. 7급과 9급 공채 합격자 가운데 10∼12%가 자격증을 활용해 가산점을 받았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통신·정보처리·사무관리 분야의 자격증을 소지한 경우 과목별 만점의 최저 0.5%에서 최고 5%까지 가산점을 챙길 수 있다.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지원법에 해당하는 취업보호대상자는 기본 가산점 10%를 포함해 자격증 가산점까지 확보할 경우 최고 18%의 가산점 혜택을 받는다. 그나마 공무원 채용시험은 응시분야별로 유효 자격증제도를 적용하고 있어 교사임용시험처럼 시험합격 후 자격증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격증의 완벽한 활용성을 장담할 수는 없다.

 국가시행 시험 대비 강좌를 개설한 학원이나 수험서를 만드는 출판사들은 ‘자격증은 곧 가산점이다’라는 공식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응시분야에 관계없이 시험에 반드시 합격하려면 자격증을 먼저 따야 한다는 친절한 안내도 잊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언론매체들까지도 국가시험 일자가 다가오면 가산점 획득방법이나 언제까지 취득해야 가산점으로 인정되는지에 대해 경쟁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잘 알려진 IT관련 자격증으로는 국가와 민간자격증을 합쳐 30여종이 있다. 이를 다시 급수로 나누면 50여종에 이른다. 우선 국가자격 시험에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시행하는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전산회계운용사, 전자상거래관리사 등이 있고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시행하는 정보처리기사 및 산업기사, 정보통신기사 및 산업기사, 무선설비기사 및 산업기사,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정보처리기능사,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무선설비기능사, 방송통신기능사, 전자계산기기능사 등이 있다.

 민간자격증으로는 한국정보통신인력개발센터가 시행하는 인터넷정보기능사, 리눅스마스터, m커머스관리사, 웹콜마스터, 정보설계사, 시스템관리사, 인터넷정보검색사 등이 있다. 또 정보산업연합회의 PCT, 교육소프트웨어진흥센터의 인터넷활용능력인증시험,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의 네트워크관리사, PC정비사도 있다.

 이밖에 전자CAD기능사, 사무자동화기능사, 웹디자인기능사, 제품응용모델링기능사, 전자출판기능사, 방송통신기사, 게임프로그래밍전문가, 게임시나리오전문가, 게임그래픽스디자인전문가, 멀티미디어전문가, 애니메이션전문가, 전자회로설계산업기사, 디지털제어산업기사, 전산응용토목제도기능사 등의 자격증이 최근 신설됐거나 향후 신설될 예정이다.

 이 중에는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취지에 부합하는 자격증도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 이름뿐인 자격증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자격증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명칭이나 시험과목 등을 현실에 맞도록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특정산업에 대한 관심도가 갑자기 높아지자 분위기에 휩쓸려 서둘러 자격증 제도를 신설했다가 곧바로 산업열기가 식어 수험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유명무실한 자격증이 나오는가하면 특정자격증 신설을 둘러싼 정부부처간의 불협화음으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관련산업이 급부상하면서 올해 초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리눅스자격증이 그 예다. 지난해 2월 노동부와 정통부가 토종 리눅스자격증의 주관부처 결정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바 있다. 국내 5개 주요 리눅스 업체들로부터 리눅스자격증 신설 의견서를 접수한 노동부는 정통부에 이와 관련한 협조공문을 보냈으나 곧 반려됐다. 이유는 정통부가 자체적으로 리눅스자격증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어느 부처가 주관하든간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격증 제도가 신설, 운영되면 그만이지만 노동부와 정통부는 주관부처가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정통부는 리눅스협의회, 한국정보통신인력개발센터와 함께 이미 오래전부터 자격증 도입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노동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노동부는 자격증 취득자에게 보다 많은 취업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노동부가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노동부는 “정통부가 민간 자격증 도입에 필요한 학원이나 교재 등에 주는 인증사업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뼈 있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리눅스자격증 시험은 3회째를 맞고 있지만 각종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우선 국내 리눅스관련 교육기관들이 존폐위기에 내몰렸다. 자격증 신설을 두고 정부부처간에 시간을 끄는 사이 리눅스 열풍은 사그라들었고 이 여파로 전문교육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미 시행중인 자격증 제도 가운데 관리미흡으로 위기에 직면한 것도 있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정보보호전문가 자격제도는 그 실효성에도 불구하고 법적지위나 교재개발·응시자격·응시료 등에 대한 세부체계가 미흡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처음 치러진 2급 자격검정에는 482명이 등록했지만 지난 5월 두번째로 실시된 자격검정에서는 응시생이 180명으로 급감했다. 최종 합격자는 1회 18명, 2회 40명에 그쳤다. 국제 자격증인 국제공인정보시스템감사사 시험에 한해동안 300여명이 합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정보보호전문가 자격검정이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홍보부족의 문제도 있지만 자격증 취득자에 대한 위상정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 주원인으로 지적된다. 국제공인정보시스템보안전문가(CISSP)나 국제공인정보시스템감사사 등의 자격증은 정보보호 전문업체 지정요건 가운데 하나인 고급인력으로 인정되는 데 반해 정보보호전문가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최근에는 서버구축 및 관리, 보안설정, 시스템 최적화 등 네트워크를 구축하거

나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네트워크관리사가 유망직종으로 부상하면서 관련 교육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 시험의 시행처가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 한국정보통신기술인협회, 한국정보통신자격관리협회 등으로 다원화돼 있는 데다 이 중 일부만 국가공인을 받은 상태여서 교육시설간의 원조경쟁 가열과 함께 수험생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자격증 신설의 취지가 우수인력 양성에 있는 만큼 정부는 시대흐름에 맞는 활용성 높은 자격증 발굴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자격증의 유명무실화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을 신속히 개설하는 것은 물론 산업발전의 속도에 맞도록 시험과목도 현실성 있게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돈되는 인증사업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인력양성에 목적을 둔 거시적인 인재육성 정책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