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성향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매우 즐겼다. 주먹만한 고무공 하나에 목숨걸고 그루터기 논바닥을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다녔다. 애호박만한 고무공이라도 구하게 되면 당시 영화 ‘월드컵’에 나오던 펠레가 된 것처럼 더 열심히 뛰어다니곤 했다.
당시의 고무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빠져 쭈그러지기 시작하고, 학교 울타리 역할을 하던 측백나무에 정통으로 맞으면 금새 바람이 빠져 고무쪼가리로 변해버려 안타까움을 주곤 했다. 어떻게 공안에 바람을 넣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터진 공안에 혹처럼 남아있는 공의 배꼽을 통해 확인하면서 느꼈던 경이로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요즘도 가끔씩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즐기기도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축구에 대한 일관된 생각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축구가 재미있는 것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만하는 경기가 아니라 여럿이하고 한순간, 그 많은 참여자 중에 자신만이 최고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뜨겁게 달아올라있다. 오뉴월 날씨뿐만 아니라 월드컵이 만들어내는 뜨거운 열기가 더해진 탓이다. 428g짜리 축구공 하나에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고 국내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서 그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도 게임이라는 요소를 통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대회 월드컵은 단순한 공차기가 아니다. 단순히 축구인들이 개최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월드컵 개최국이나 참가국들이 경제, 문화, 사회, 외교 등 종합적인 국력을 경쟁하는 무대이며, 서로 이해와 협력이 발휘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월드컵을 단순한 국가 대항 축구경기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매회 월드컵마다 개최국에 엄청난 유무형의 이득을 안겨주는 경제잔치로 변모한지 오래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나 ‘고정관념’에 대한 역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외국에 나갔을 때 외국인들은 먼저 일본인이냐고 물어온다. 그 다음에 한국인이냐고 물어온다. 일순간에 극복할 수 없는 고정관념이다. 88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긴 했지만 일·한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지는 못했다.
새로운 천년의 첫 번째 월드컵의 공식명칭은 한·일 월드컵이다. 어떤 사유에서든 일·한이 아닌 한·일 월드컵이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개막식 행사는 분명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 자신만만한 IT 대한민국의 힘을 전세계에 떨친 행사로 치러졌다. 특히 IT를 주제로 펼쳐져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 ‘최첨단 IT기술로 성공적인 월드컵을 치른 나라’ ‘세계 IT산업을 선두하는 나라’ 등 좋은 이미지로 많은 외국인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던 행사였다.
이러한 우리나라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분명 우리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전 세계가 서로 종전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게 될 것이다. 협력의 폭은 서로에 대한 신뢰에 크게 좌우된다. 투자, 특히 장기투자는 최소한의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렵다. 만약 신뢰부족 때문에 서로 이득이 될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면 그만큼 손실을 보는 것과 같다.
개막식과는 별도로, 우리나라와 일본은 이번 월드컵행사 중에 IT기술에 대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기장에서는 참가국들끼리 우승국을 가리는 반면 장외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전세계를 상대로 IT시험을 치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이번 월드컵을 ‘IT월드컵’이라는 구호아래 실력과시에 나섰다. 월드컵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통신업계에서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나라 IT가 공동개최국인 일본을 훨씬 능가함은 물론 세계 최고 수준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운영면에서도 월드컵은 본부, 경기장, 국제미디어센터(IMC)를 연결하는 근거리 통신망(LAN)과 광역통신망(WAN)이 구축되고 이동전화, 주파수공용통신(TRS), IMT200, 인터넷, 팩스 등 유무선 통신서비스들이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월드컵을 취재하는 세계 각국 언론인들은 더 이상 프레스센터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운동장 안팎에 최첨단 무선랜이 운영되고 있는 만큼 노트북이나 PDA 하나로 어디에서든 전 세계에 기사를 송고할 수 있다.
경기장과 국제방송센터(IBC)간 2.5 급 광케이블을 깔아 유료방송중계회선으로 제공되고 각종 미디어를 위한 전용 전화, 데이터(ADSL과 ISDN), 무선랜 인터넷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통신망의 속도도 프랑스 월드컵이 512Kbps였지만 이번 한일월드컵은 2Mbps용량의 두 회선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번 월드컵은 디지털 TV를 통해 보는 최초의 월드컵이다. 경기장의 카메라에서부터 국제위성지국까지 모든 방송중계망이 100% 디지털이며(270Mbps) 월드컵대회 최초로 MPEG코덱을 사용해 영상을 압축 전송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경기장면을 세계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국제 방송센터가 우리나라에 설치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서 개최되는 경기장면이 세계 200여 방송사에 공급된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의 데이터가 서울로 모였다가 가공, 처리되어 다시 전세계로 전송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리는 결승전 경기도 우리나라를 통해 전세계로 전송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발신지가 된 것은 불행한 역사와 안타까운 사고뿐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문화와 기술과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수신인이었을 뿐이었다. 월드컵 개막식 주제 ‘동방으로부터(From The East)’는 발신지가 동방, 즉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을 수신자에서 발신자로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아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 역전의 기회는 IT를 통해 오고 있다. 월드컵기간 중에 HDTV나 IMT2000서비스 등 우리의 각종 첨단기술들이 시연됨으로써 해당 IT기업과 제품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것은 나아가 국가브랜드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먼저 한국인이냐고 물어올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월드컵을 활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IT기술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소극적 자세에 그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본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월드컵을 국가나 기업 브랜드를 높이는 홍보기회로 활용하기보다는 안전하고 질서있는 경기를 치르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비 지향적이다.
기회가 포착되면 과감해야 한다. 단 한순간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공격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공격이 최상의 방어작전이다. 게임을 지배하고 계속 몰아붙여야 한다. 또한 즐기며, 재미있게 게임을 진행하여야 한다. 밥도 먹지 않고, 논바닥에서 신발도 신지 않고 공차기를 즐기듯 게임을 즐겨야 한다. 유연하지 않으면 그 게임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역전의 기회에 역전시키지 못하면 또 오랫 동안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절대로 기회는 함부로 찾아오지 않는다. 치고 나가라.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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