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이버세계에서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당신의 몸을 사이버세계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사이버세계에 육체는 없다. 사이버세계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비트는 무게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나의 눈과 귀에 자극을 보내주는 신호뭉치에 불과하다. 중력이 없는 사이버세계는 육체가 증발된 세상이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 당신의 육체는 서서히 증발한다. 육체를 모니터 건너편에 남겨 둔 정신은 모니터의 강을 건너 네트 속으로 들어간다. 육체는 모니터의 수면을 접하면서 산산이 부서진다. 나의 몸은 더이상 나를 나이게 하는 틀이 아니다. 나는 수십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 파편이 된 나는 무엇이나 될 수 있는 동시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분열과 모순의 주체가 된다.
육체를 동반하지 않는 네트의 정체성은 현실 사회의 그것과 다르다. 현실세계에서는 처음 만나는 상대라도 그의 정체를 어렵게 알 수 있다. 육체에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묻어 있다. 관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얼굴만 보고서도 그 사람의 성격까지 맞출 정도다. 처음 만난 상대를 보자마자 나이와 성별과 인종을 대충 맞출 수 있다. 옷차림이나 목소리에 그 사람의 정체가 반쯤은 이미 드러난다. 무엇보다 그(그녀)의 얼굴에서 많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처럼 육체는 개체의 정체를 달고 다니는 명찰과 같은 것이다.
육체를 동반하지 않는 사이버세계의 정체성은 타고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만들어진다. 상대와의 만남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사이버세계의 정체성은 현실세계처럼 확정된 지위에 따라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현재 진행형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육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만큼 새롭게 열려 있는 불확정의 정체성이다.
사이버세계는 상상력이 가상으로 만들어내는 가짜 같은 진짜 현실이다. 가상체험은 실제와 똑같이 신경을 자극해 현실과 똑같은 반응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현실세계의 물체와 달리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는 비트로 이뤄진 사물이라는 점만 다르다. 사이버세계의 사물은 환각 약물과 비슷하다. 거의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의 감각체험을 극단적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정체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다.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자기 정체성은 현실 사회의 육체적 제약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다중 정체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검열받지 않은 열린 정체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디지털 문화는 현실의 제약에 의해 닫혀지고 고정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열린 정체성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런 정체성의 기반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욱인 서울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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