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선진국가들의 나노기술 연구소를 현지 취재하는 ‘세계나노기술현장을 가다’ 시리즈가 끝을 맺는다.
누구나 아는 얘기겠지만 요즘 ‘나노’란 단어는 21세기를 맞아 인터넷·컴퓨터처럼 과학기술에 관심없는 보통 사람들도 흔히 접하는 일상용어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나노기술의 실체에 대해 명확히 안다는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도 흔치 않다. 지난 80년대 일찍이 정보화시대를 예언했던 IT선각자들도 오늘날의 인터넷 세상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듯이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다는 나노기술 역시 아직까지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는 모호한 상태다.
‘도대체 나노기술이란 무엇인가.’ 이 화두를 잡고 전자신문사는 지난 4개월 동안 미국·일본·유럽 등지의 나노기술 연구소들을 샅샅이 방문했다.
취재를 떠가기 전 나노기술도 세계 과학계에 가끔 스쳐가는 바람(유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온 초전도체니 핵융합발전이다 해서 세상을 뒤바꿀 과학혁명이라며 언론이 앞서 호들갑을 떨다가 금방 시들해진 적이 한두번이던가. 보통 사람들은 그저 특정 과학기술이 향후 상업적 가치가 있느냐에 관심을 쏟을 뿐 실제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나노기술분야에서 과학계와 일반 대중 사이에 벌어진 인식차이를 얼마나 줄이느냐. 이것이 나노기획취재의 기본목적이었다.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졌다는 나노기술이 과연 기대만큼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 취재진 또한 많은 과학자들처럼 나노기술의 실체와 파장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상태에서 취재여정을 시작했다.
◇미국편=첫 방문지인 코넬대학의 나노연구소(CNF)는 국가적 중장기적 나노과학을 위한 시설이다. 이에 비해 스탠퍼드 나노연구소는 기존 반도체 기술한계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는 식으로 지역별로 특화된 미국 나노연구전략의 강점을 엿볼 수 있었다.
미국 나노전문가들은 스핀전자소자나 양자컴퓨터에 대해 향후 5∼10년 내에 획기적인 성과를 장담하고 있었다. 단기적으로 성과를 확신하지 못하면서 나노기술의 미래응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낙관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이같은 경향은 기존 반도체기술이 조만간 한계에 부딪히면서 나노기술 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현실과 나노기술의 발전속도가 예상보다 매우 빠르다는 데 근거한다.
특히 각 연구실간의 유기적인 네트워크가 활발하고 기초연구단계부터 응용·상용화를 함께 생각하는 시스템과 산·학·연간의 협조가 매끄럽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9·11테러를 계기로 해서 국방분야에서 거대한 나노관련 군사기술용역이 흘러나와 다른 나라가 범접하지 못할 나노기술의 상용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점은 매우 부러웠다.
◇일본편=나노연구와 관련해 일본 과학계가 구축해둔 연구인프라의 규모와 수준은 실로 대단했고 후발국인 한국이 설비투자로 따라잡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황이란 것이 취재진의 공통된 결론이다.
현재 세계의 나노연구 예산 중에서 미국과 일본과 유럽이 3분의 1씩을 사용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방대한 실험설비와 장기간의 연구경험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실제 연구인력의 숫자가 적었고 연구소간 횡적인 협조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사회의 시스템적인 경직성 때문에 국립연구소가 나노연구를 주도하다 보니 중복연구가 발생하거나 민간업체와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본의 장기적인 나노연구 태도는 좋지만 상용화면에서 미국보다 한박자 느린 듯한 인상인데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대학과 정부연구소의 나노연구에 있어 일본은 매우 좋은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럽편=유럽의 나노기술은 언뜻 보기에 유럽의 나노기술이 미국·일본과 비교해 그다지 큰 차이점은 없다. 전자빔리소그래피 기술을 이용해 나노구조물을 제작하고, STM 및 AFM으로 원자와 분자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모습은 미국과 일본에서 보던 그대로다. 그러나 유럽의 나노기술은 나름대로의 강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특징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나노기초기술연구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유럽은 그 동안의 통합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라마다 다양한 문화적 유산이 남아 있어 독특한 나노기초연구에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국가연구비의 지원비중이 높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단기적인 경제효과로 연결되지 않아도 유럽의 나노연구성과는 세계를 주도해 왔다. IBM 취리히 연구소는 나노기술연구의 기폭제가 된 STM 및 AFM을 발명했다. 또 88년 프랑스의 과학자는 나노다층박막에서 거대 자기저항현상을 발견했다. 이 거대자기저항기술은 98년부터 미국 IBM이 상용화해 세계 HDD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예는 나노기술분야에서 유럽이 기초기술에 강하나 상용화기술이 뒤떨어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유럽도 나노기술을 곧바로 경제적 효과와 연결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노기술을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미 상당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선진국과의 협력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3개 지역을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면 국내 민간기업이 나노기술을 시급히 개발하는 데 있어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유럽이 적절한 파트너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유럽은 다양한 기초기술, 우리나라는 상업화기술 개발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가장 적절하게 채워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유럽은 오랫동안 나노분야에서 연구투자를 해왔으며 국내 민간기업이 적절한 투자를 할 경우 많은 시너지효과가 예상된다.
취재결과 세계의 나노기술은 아직 상업적 응용은 초기단계에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 나노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면 선진국과 대등한 수준의 나노기술의 상업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원천기술의 개발보다는 어느정도 실용화 가능성이 있는 기술분야에 뛰어들어 상업화 기술을 주로 개발하는 연구패턴을 선호해 왔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우리의 인적·물적 인프라를 고려할 때 하나의 합리적인 대안이었으나 나노분야에서 이러한 연구방식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나노기술의 응용주기가 매우 짧아 때문에 원천기술을 개발하지 않고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를 한바퀴 돌며 나노취재를 끝낸 결론을 내리자면 나노기술은 일시적인 과학계의 유행이 아니었다. 인류의 가공기술이 마이크로 단위를 넘어 분자단위로 더욱 정교해지는 기술문명의 자연스런 흐름을 나노기술이라고 새삼스레 이름붙인 것 뿐이다. 21세기 과학기술의 알파와 오메가. 그것이 나노기술이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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