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이 부실을 낳는 악순환 고리를 끊어라.’
우리나라 대학 부설연구소에 던져진 과제다. 현재 전국 380개 국·공·사립대학에서 1456개(한국학술진흥재단 등록기준)의 부설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관련기관에 등록하거나 인증받지 못한 부설연구소를 합할 경우에는 2000개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연구분야도 정보통신·경제정책·기초과학·인문과학·의학·우주항공·자연과학·사회과학·기계기술·품질혁신 등으로 다양하며 김치연구소까지 등장했다.
외견상 왕성한 활동력을 짐작케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산업계와 학계를 선도할 만한 실적을 내놓지 못한 채 본연의 임무(연구활동)를 외면한 일부 부설연구소들이 간판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수 개인의 논문집필기관이나 정부지원을 끌어내는 창구로 전락한 부설연구소도 있다.
“이제 정말 지쳤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 말도 안되는 실험과제, 교수님들의 개인비서 노릇까지 해야 합니다. 거기다 논문 가로채기까지….”
생명공학기술(BT) 관련 연구소에서 6년째 활동중인 박사과정 2년차 학생의 푸념이다. 그는 요즘 영어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하루 빨리 부설연구소를 탈출(?)해 해외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제가 밟고 있는 박사과정에서는 3개월씩 9개월간 3개 프로젝트를 이수합니다. 이때 관심있는 프로젝트를 선택해 담당교수와 일을 함께 진행하는데 관련 프로젝트는 해당 교수가 연구비 지원을 따낸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연구작업은 학생이 수행하게 됩니다.”
공학계열 박사 2년차 학생의 상황이다. 부설연구소를 이끄는 지도교수의 능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얘기. 이같은 구조는 대학과 교수의 밀월에서 비롯된다. 많은 부설기관을 유지함으로써 정부로부터 보다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대학에 프로틴(protein)연구소와 단백질연구소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지도교수도 각각이다. 초등학생도 구별해낼 만한 ‘프로틴=단백질’을 이용해 보다 많은 지원금 유치수단으로 활용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지방의 한 대학 부설연구소는 아예 중소기업 창업스쿨 연수기관이자 대학원생들의 실습교육장으로 변질됐다. 특별한 연구 프로젝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연구원간 교류활동도 없다. 실제 관련 부설연구소의 인터넷 게시판이 텅 비어있다.
첨단소재연구소·기초과학연구소·신기술연구소 등 그럴듯한 이름과 달리 연구활동이 없는 유령 부설연구소도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현실에서 산업계를 선도하고 노벨상에 근접한 연구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기업들도 대학 부설연구소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있다. 공동연구나 첨단기술 개발위탁보다는 유능한 인력을 발굴해 선점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 기업의 한 관계자는 “사업부서·사내연구소별로 대학 부설연구소에 대한 다양한 지원을 펼치고 있으나 핵심기술 연구를 의뢰하기보다는 석·박사급 고급인력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 부설연구소에 대한 기업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연구비 지원이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향이다. 이는 곧 대학 부설연구소의 연구환경을 약화시키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교수들은 대학 부설연구소 활동을 접고 아예 창업전선으로 뛰어드는 모습이다.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대기업들로부터 보다 많은 지원을 얻어내는 효과로 연결된다는 판단에서다.
대학 부설연구소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교수와 학생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수술에 나설 때라는 게 기업·교수·학생들의 분석이다.
예를 들어 41개 부설연구소와 114개 연구·실험실을 운영하는 포항공대는 연구처를 두고 △중장기·단기별 연구계획 △대내외 연구협력 △부설연구소 관련 행정업무(연구비 산정·청구·집행) △연구계약 및 연구비 관리 △연구보고서 관리 △지적재산권 출원 및 등록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연구기획으로부터 연구진행·사후관리를 종합적으로 운영함으로써 효율적인 부설연구소 체계를 갖춘 것이다. 포항공대는 현재 200여명의 교수진을 대상으로 1인당 2.9건의 연구과제와 3억2300만여원씩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같은 포항공대의 부설연구소 운영시스템은 96년 51건이던 국내외 지적재산권을 2000년 137건으로 늘려놓았다. 교수 1인당 연간 학술지논문이 6.2건, 국제학술지(SCI)게재물이 2.9건으로 올라서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성균관대학교 김태웅 교수는 “대학 부설연구소가 연구활동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며 “현재 4년간 지원되는 대학 부설연구소 연구비를 7∼8년으로 연장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결과가 2∼3년 사이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 또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에 매몰된 대학 부설연구소 운영보다는 인력(학생)양성을 병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연구비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김태웅 교수의 시각이다.
김 교수는 “현재의 대학 부설연구소 시스템으로는 평균 15명 정도의 연구조교를 둘 수 있는 구조”라며 “연구원 고용과 지도교수 확충을 위한 펀드를 조성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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