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인터넷 혁명이전(BIR:Before Internet Revolution)과 인터넷 혁명이후(AIR:After Internet Revolution)로 나눌지도 모른다. 인터넷 혁명이전은 인간 생활이 물리공간(Physical Space)에 한정된 시대라고 한다면 인터넷 혁명 이후는 생존 공간이 전자공간(Cyber Space)으로 이동한 시대다.
과거 인류 발전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물리공간을 확장하고 이를 집적화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운하와 도로를 만들어 도시를 연결하는 것이 물리공간의 확장이라면 도시에 건축물과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집적화다. 이 과정을 제1공간의 개척과 고도화에 의한 ‘물리공간 중심시대’라고 부르기로 한다.
물리공간에서는 거리·면적·위치·밀도 등이 중요한 의미을 갖는다. 그래서 물리공간 중심시대는 국토가 넓고 세계 중심에 위치한 것이 국력의 척도이자 경제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과학적 소산으로 일컬어지는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국가발전의 무게중심이 또 하나의 생존공간인 전자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동안 물리공간에만 의존했던 인간의 생활 무대가 IT혁명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대륙’으로 옮겨지고 또 그러한 삶의 양식을 강요받고 있다. 지난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공장과 도시로 사람을 불러모았지만 IT혁명이 일어난 지금은 전자공간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난 60년대 고도 경제성장 과정부터 우리나라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새로운 청사진을 만들어 물리적인 국토 발전을 도모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전자공간도 또 하나의 국토라는 인식 아래 ‘사이버코리아21’과 ‘e코리아’라는 ‘21세기판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해 사이버 국토 건설을 추진해 왔다.
정보고속도로를 놓고 네티즌을 교육시켜 국민을 물리공간에서 전자공간으로 이주시켰다. 이를 통해 IT산업강국과 정보화 대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졌다. 이같은 과정은 제2공간의 개척과 고도화에 의한 ‘전자공간 확장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에 대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관한 오래된 철학적 논쟁을 상기시켜 준다. 육체가 없는 정신은 공허하고, 정신이 없는 육체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물리공간의 기반이 없는 전자공간은 불완전한 공간일 뿐이다. 물리공간과 괴리된 전자공간은 무한히 팽창할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은 공허한 거품일 가능성이 높다.
물리공간을 종횡으로 누비는 택배회사가 없다면 전자상거래는 실물경제의 활력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전자공간일수록 효율적인 물리공간을 요구한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육체와 정신이 결합해 생명(life)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상을 만들어 내듯이,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결합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전자공간의 무제한성과 물리공간의 실체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공간은 아직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전자공간의 정보가 물리공간의 물체와 연동되고 반대로 물리공간의 물체는 전자공간의 정보로 전환되는 새로운 도전의 영역이다. 정보와 물체간의 자유로운 상호교통이 가능해지는 프론티어의 대상이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이 어우러져 창조되는 새로운 공간을 우리는 ‘제3공간’으로 규정한다.
제3공간은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제3공간이 주는 기회와 도전은 상상을 불허한다. 바로 여기에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엔진과 활로가 숨어있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고 상호 소통을 존중하는 초공간(super space)에 대한 개척은 21세기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과제이다. 이제 우리는 사이버 인프라 대국에서 초공간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가 지식정보강국으로 가는 기본방향을 ‘제3공간 개척과 고도화’로 전제하고 21세기 한국의 발전 방향과 성장 엔진으로 제3공간 개념을 제시한다. 아울러 제3공간을 규명하는 이론과 함께 국가정보화 구현을 위한 새로운 전략도 탐색해 본다.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출돌 사관으로 세계질서를 재단하고 있지만 21세기 세계관은 현실공간과 전자공간의 충돌(the crash of inter-space)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제3공간시대를 위한 새로운 국가경영의 요체는 제1공간과 제2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이나 갈등과 같은 공간간 긴장관계(inter-space divide)를 해소하고 공간끼리의 커뮤니케이션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정보화 투자의 중심도 공간간 최적 융합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데 두어야 한다. 물리공간의 기능을 전자공간으로 이동시켜 물리공간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된다. 공간간 보완과 대체로 물리공간을 재구성하고 역할을 재정립하는 ‘공간간 혁명’을 통해 공간간 공진화(Co-Evolution)를 존중하는 제3공간 경영의 세기를 맞이해야 한다.
지금의 IT혁명은 공간 혁명의 서곡일 뿐이다. 공간 혁명은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의 상호 충돌과 침투를 통해 완성된다. 제3공간은 이러한 역동성 있는 공간 혁명을 통해 창출된다. 두 대륙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높은 산맥이 형성되듯 제3공간은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이 충돌하고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가치공간이다.
제3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같은 제3공간의 등장에 대비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문명사적 혁명의 중심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공동집필>
하원규 ETRI·IT정보센터장 wgha@etri.re.kr
김동환 중앙대·공공정책학부 교수 sddhkim@cau.ac.kr
최남희 청주과학대·행정전산학과 교수 drnhchoi@cjcnet.chongjunc.ac.kr
◆공간혁명 과정과 제3공간 시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출발한 산업혁명은 교통혁명으로 이어지고 대량생산, 대량판매 체제로 연결되면서 물리공간 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IT혁명은 물리공간 중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전자공간의 활용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우리는 이러한 IT혁명에 성공적으로 도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일궈냈다. 또 이같은 여세를 몰아 세계 최초로 초고속 유무선 통합망 인프라 정비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전자공간에서의 성공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대장정의 시작일 뿐이다. 스팸 메일의 무분별한 발송에서도 나타나듯 전자공간에 대한 수단적이고 맹목적인 인식은 제3공간에서는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물리공간의 엄격한 제약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고집할 때 제3공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준비할 수도 없다. 물리공간을 천시하고 전자공간을 숭상하는 현대판 무인천시 풍조 아래에서도 제3공간의 창출은 억제된다. 21세기를 여는 오늘은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에 관한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제3공간론은 향후 우리가 직면하게 될 공간에 관한 접근구도이자 사고 양식이다. 제3공간론은 전자공간의 창조성과 무제한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물리공간의 실체성에 기반을 둔다. 제3공간론은 초공간이 지닌 경제적 기회를 포착하고 정치사회적 이슈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오마에 겐이치는 ‘보이지 않는 대륙(The invisible continent)’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모든 국가, 기업, 개인들은 지도상에 없는 전자공간이라는 대륙에서 어떻게 승리하고 살아남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제3공간론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제3공간론은 ‘보이지 않는 전자공간’과 ‘보이는 물리공간’의 최적 연결이야말로 모든 국가, 기업, 개인들이 추구해야 할 경영전략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3공간론은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이분법이 만들어낸 거품을 걷어내고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연계를 축으로 진행되는 초공간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중시한다. 미래 10년을 내다보며 제3공간론에 대한 도전을 통해 우리나라가 IT혁명의 세계 중심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새로운 아젠다를 던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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