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안정과 개혁

 ◆<박재성 국제부장 jspark@etnews.co.kr> 

 HP와 컴팩의 합병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핵심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IT업계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합병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또 칼리 피오리나와 월터 휴렛간의 전문경영인과 오너의 대립구도도 초점에서 다소 빗나가 있다. 남녀의 성 대결은 더더욱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그 핵심은 바로 개혁 세력과 안정 세력의 싸움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60여년을 프린터와 컴퓨터로 성장한 HP가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꾸려나가기만 하면 만사형통일 것 같기만 했다. 그런데도 칼리 피오리나는 HP의 최고 경영자(CEO)로 취임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개혁이라는 칼을 들이댔다.

 컴팩의 인수를 통해 그동안 경쟁력이 취약한 사업 부문을 과감히 정리, 수익성을 한층 높이기 위해 단안을 내린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인 인력을, 그것도 전체에서 10%나 되는 1만5000명을 단번에 정리해고하기로 한 점만 보더라도 그 개혁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칼리 피오리나는 “경기 침체와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같은 조치에 대해 “무슨 소리냐”며 반기를 든 사람은 HP의 창업자 후손인 월터 휴렛이었다. 특히 그는 칼리 피오리나의 개혁이 ‘방향 착오’라며 주주들에게 자기의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미 많은 자산을 축적한 창업가 후손은 과거의 수고와 결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개혁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 피오리나는 “변화를 거부하다가는 도태된다”고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세력을 몰아붙였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주주들에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한 홍보비 규모다. 칼리 피오리나가 5억달러를, 월터 휴렛이 3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이것을 합치면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1조원에 달한다.

 개혁과 안정 중에서 택일을 해야만 했던 90만명에 달하는 주주들의 입장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표만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6개월 간의 대장정 끝에 마침내 지난달 실시된 찬반을 묻는 투표에서 주주들은 박빙의 차이였지만 ‘개혁’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현실에 자족하려는 안정보다는 위험이 따르더라도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개혁에 더 많은 표를 던진 것이다.

 HP와 컴팩의 합병을 둘러싼 이번 사건이 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까지도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기업이 처한 현 상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하는 인식의 문제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 기업으로서 HP만이 갖는 특수성은 존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보기술(IT) 기업으로서 갖는 환경의 보편성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볼 때 HP의 문제는 바로 우리 기업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쟁력이 강한 HP마저도 현 상황을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격변의 시대상황으로 인식한다면 우리 기업 가운데 개혁에서 예외일 수 있는 대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치열한 현실 인식과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준 칼리 피오리나, 위험성과 대량의 정리해고를 해야 하는 아픔이 따르는 개혁인데도 그 당위성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성적인 주주, 이들 모두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