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14)대학원이 흔들린다(상)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대학원생인 P씨는 최근 주위 친구 2명을 떠나보냈다. 한명은 증권회사, 한명은 군대를 선택했다. P씨 자신 역시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 속에 실험실의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서울대 전기전자공학부 조교이면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B씨는 최근 들어 공대대학원 내에서 고시한다고 뛰쳐나간 학생들이 잦아져 마음이 심난하다.

 현재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있는 소위 ‘5공 사이언스키즈(Science Kids)’들이 희망과 미래를 점칠 수 없다는 고뇌에 빠지면서 대학원 이탈현상이 또 하나의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들은 80년대 정부의 과학육성 드라이브 정책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잇따른 이탈은 국가경쟁력과 미래를 책임질 전문인력들이라는 점에서 이공계 대학 기피와는 또 다른 충격과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사실 이공계 대학졸업생이 전공과 상관없는 직장에 들어가 지나간 4년을 만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헛도는 대학 이공계 교육에 대한 지적이 들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대학원 석·박사 과정의 전문인력들이 연구를 접고 다른 진로를 택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엄청난 낭비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인연합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공계 대학원생의 56%가 비이공계로의 전환을 고려한 바 있고 14%는 실제로 이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공계 대학원생 1000명을 대상으로 ‘이공계 대학원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는가’란 여론조사에서는 38%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학교를 등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지적되는 사회적인 이공계 인력 홀대만으로는 그 이유가 불충분하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과학기술투자가 일시 감소하고 기업 부도, 출연연구소 개혁 등으로 인해 이공계 인력이 구조조정 대상으로 전락했을 때도 이공계 대학원은 신입생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돈과 명예욕 때문에 학교를 떠난다’고 냉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한 사람의 고급인력이 1만명을 먹여살리는 IT시대에 이의 첨병인 이공계 인력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대학원생 이탈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대학원 교육 자체를 들고 있다. 이들은 대학원 교육이 커리큘럼 부실, 연구활동 미비, 취업의 어려움 등 학부과정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전방위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학생과 교수들이 공통으로 꼽는 대학원 교육의 가장 큰 난맥상은 ‘교수인력 부재’다. 대학원에 가르칠 교수가 없다는 얘기다. 연구중심 대학원을 표방한 서울대의 경우 정부의 연구인력 지원정책인 ‘두뇌한국21(Brain Korea 21)’이 시행된 이후 대학원생수는 급증한 반면 교원수는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실제 서울대 전기전자공학부의 현 대학원생은 지난 97년 대비 30%나 늘어난 1600명이지만 교수 인력은 예나 지금이나 70명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학부의 대학원 지도교수 1인당 학생수 비율은 97년 9명에서 현재는 16명으로 증가했다. KAIST의 경우에도 교수요원 부족은 마찬가지다. 설립 당시부터 연구중심 대학원을 지향한 이 대학의 교수 1인당 평균 대학원생수는 18명이다.

 이공계 대학원의 교육이 거의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교수와의 맨투맨 강의가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가르칠 인력이 적다는 것은 바로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1순위로 지목된다.

 서울대학교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안으로 강사진을 늘리고 있지만 교수 부족현상이 해소되기는 어렵다”면서 “정규교수 채용을 늘릴 경우 1인당 연간 수천만원의 경비가 더 들기때문에 이를 부담할 재정형편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교수 부족과 더불어 빡빡한 강의시간도 대학원 교육의 질 저하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서울공대 대학원 교수들의 일주일 책임 강의시간은 6시간. 이는 3학점짜리 강좌를 3시간씩 일주일에 두번해야하는 시스템으로 모든 교수가 학부소속임을 감안할 때 학부 강의에 밀려 밀도있는 교육이 어려운 형편이다.

 더욱이 일부 서울의 사립대 및 지방대들은 야간과정을 포함해 교수들에게 대학원 책임강의시간으로 일주일에 15시간 이상을 배정하고 있어 대학원의 강의가 시간때우기식으로 전락한 사례도 적지않다.

 대학원생들은 또 우리나라 특유의 ‘도제식’ 교육도 대학원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수와 제자 사이가 주종관계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문탐구의 장이 교수 눈치보기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한양대 박사과정 3년차인 K씨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대학졸업 후 대학원에 들어가 ‘병역특례’를 희망하는데 혹 지도교수에게 잘못보여 졸업을 못하고 군대갈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 때문에 각종 프로젝트 수행시 자기 희망과는 무방한 작업을 하면서도 건의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한 사립대학 전기공학부 대학원 조교는 “대학원생 통장에 입금돼야할 BK 지원금 중 일부가 지도교수에게 넘어가고 있지만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항의하지 못한다”면서 “심지어 교육부의 BK사업단 감사가 있을 때면 설문지를 작성한 학생들이 작성 후 사전에 교수에게 확인받는 경우도 있다”며 도제식 교육의 횡포를 지적했다.

 학교 당국의 눈가리고 아웅격의 대학원 운영에도 비난의 소리가 높다. 어느 사립대의 전기공학부는 BK 지원금으로 집에 있는 주부박사를 연구실 박사급 조교로 임명했지만 실제 연구 및 학생지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이에 대한 별다른 제재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학교 석사과정의 한 학생은 “우선 지원금부터 받고 보자는 학사행정”이라고 분개했다.

 서울대·포항공대·KAIST 등 연구중심 대학원의 교수들은 현 이공계 대학원의 문제점으로 ‘학생질 저하가 눈에 두드러지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교수들은 현재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 박사 3년차와 석사 1년차의 수준차이가 너무 심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똑같은 학문의 이해도가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KAIST 생명화학공학과 이상엽 교수는 “대학원 진학생들이 크게 늘다보니 양은 늘었지만 질은 저하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국가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공계 석·박사 연구인력들이 학교 내의 잘못된 교육환경에 멍들고 있다.

<명승욱기자 swmay@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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