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렬(한국생산기술연구원 고속전철기술개발사업단장) chungkr@kitech.re.kr
98년 프랑스에서 월드컵이 치러질 당시 장거리 출장이나 여행을 떠나게 된 축구팬들의 실망을 달래준 것이 바로 고속전철이었다. 186마일(최고 320마일)을 자랑하는 TGV를 이용하면 경기 시각에 맞춰 출발지로 돌아오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러 날이 소요되는 여행일 경우에는 아예 느긋하게 고속전철 안에서 게임을 즐기며 경기장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과 부산을 2시간 15분대에 주파할 수 있는 고속전철 시제차량이 개발되고 있다. 우리 기술로 개발 중인 속도 350㎞/h의 한국형 고속전철이다. 차량제작업체인 로템 의왕공장에서 공개된 시제열차는 동력차와 동력객차 각각 2량, 객차 3량으로 편성된 7량 짜리 한국형 고속열차 가운데 1호 동력차 부분이었다.
고속전철 기술개발 사업은 차량시스템 및 부품분야, 전기·신호 및 선로구축물 분야로 대별되어 추진해온 사업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 해당 분야의 주관 연구원으로 선정돼 범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고속전철 사업을 지휘해 왔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세부 과제별로 한국전기연구원, 로템, 현대중공업, 유진기공, 대원강업, 캐리어 및 한국 DTS 등이 참여한 차량시스템 및 부품 개발 분야의 연구기획 단계에서부터 총괄 지휘를 맡고 있다.
고속전철 기술개발 사업은 국가적으로 추진되는 대형 프로젝트인만큼 위해 국내 기업, 특히 중소기업이 적극 참여하는 실질적인 산·학·연 공동 연구체계 구축에 집중했다. IMF로 인한 예산 삭감, 기업 구조조정 등의 어려움을 딛고 동력차 1호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힘도 한국형 고속전철기술 개발에 대한 참여기업들의 의지로부터 길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기업에 의해 우리 기술로 체화된 토종 작품이라는 점에 한국형 고속전철 기술 개발의 진정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번 성공을 통해 한국은 고속전철 기술의 세계시장 공급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차량설계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차량시스템의 밑그림 작성, 즉 차량 편성안의 성능비교 분석 및 차량 개념설계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이는 서비스 운행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키는 차량 개발에 있어 핵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차내·외 디자인, 판토그라프 등 한국형 고속전철의 경쟁력은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특히 고속주행을 위한 핵심부품 중 하나인 판토그라프의 경우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유진기공이 공동 개발, 지난해에 이미 종합성능시험과 350㎞/h 고속풍동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당시 시험을 참관했던 일본 연구진들까지 놀라게 했던 판토그라프기술 역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개발에 성공한 순수 국산기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자랑스럽다. 그러나 한국형 고속전철 기술 개발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발에 성공한 각각의 차량들이 한 몸으로 합쳐지고, 시험과정을 통해 성능을 확인하기까지는 아직 몇 개월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업에 참여한 기업과 연구기관은 한국형 고속전철이 서울과 부산간 선로 위를 맹렬히 달려 그 안전성과 탁월함을 입증 받을 때까지 그 성공 여부를 속단할 수 없다. 지난 6년간 연구실에서, 설계실에서, 공장에서 땀흘리며 일할 때의 심정이 그랬듯 성공의 웃음은 그 날까지 유보해 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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