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이미 날은 훤히 밝아 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빈속을 자극하는 음식냄새가 안방까지 퍼진다. 이불 속에 누운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다.
‘가만 있자. 아내는 친정에 가있지 않은가. 지금 집에는 나 혼자 뿐이다.’
얼마전 구입한 주방로봇이 독신자전용 쿠킹모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밥짓기에서 설거지, 찬장정리로 이어지는 부엌일은 평균적으로 가사노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첨단 가전제품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주방에서 반복되는 음식조리의 전후방공정에는 자동화기술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요즘 설거지를 해주는 식기세척기가 나왔지만 과거 자동세탁기나 진공청소기가 해냈던 가사노동의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에는 못미친다.
예컨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주방은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보통 주부에게 부엌일이란 육아와 함께 일상을 얽매는 고달픈 반복노동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 때라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들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 꾸며낸 얘기로 생각된다.
만약 싱크대 위의 조리작업에도 로봇기술이 적용돼 주방자동화(KA:Kitchen Automation)시장이 형성된다면 잠재수요는 실로 엄청나지 않겠는가.
가정주부의 오랜 꿈인 요리하는 로봇은 실제로 일부 실용화단계에 근접하고 있다.
영국의 스테포드셔 대학에선 접시를 닦아 찬장에 정리할 수도 있는 로봇팔(플렉시봇:flexibot)을 개발, 올해안에 선보일 계획이다. 이 로봇팔은 벽과 천장에 자벌레처럼 붙어서 옮겨 다니며 다양한 가사일을 한다. 마치 사람 몸뚱이에서 떨어진 두 팔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플렉시봇은 벽면의 전용소켓에 꽂힌 채로 전원과 제어프로그램을 공급받는데 타잔이 줄을 타듯 이웃한 다른 소켓에 본체를 번갈아 꽂아가며 온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다.
이 마법의 손은 본래 장애인을 위해 개발됐지만 보통 가정의 주방일에도 손쉽게 적용 가능하다.
앞으로 3∼4년 뒤면 라면정도는 어렵지 않게 끓이는 주방용 로봇팔이 상용화될 전망이다.
더 좋은 소식은 먹고난 빈 그릇을 개수대에 놓으면 로봇이 알아서 씻고 찬장에 집어넣을 것이란 점이다. 이미 국내서도 유사한 주방용 로봇개발이 시도되는 상황이다.
로봇이 부엌일까지 도와주는 ‘이 편한 세상’이 온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선 주부들은 매일 반복되는 부엌일에서 다소 풀려나 사회생활에 참여도가 높아지고 독신자층의 지저분한 주방환경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기계손이 차린 밥상이 맛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말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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