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12)학교편-2. 대학의 교육 인프라(상)

 “원점 조정이 되지 않는 계측기가 있으니 실험 데이터는 공식에 수치를 넣어 계산한 후 보고서로 제출하십시오.”

 A대학의 ‘전자회로’ 실험실. 실험 조교는 학생들에게 연구장비 사용법이 아닌 실제 측정값의 오류를 고쳐 보고서를 작성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발진회로를 꾸미고 있는 학생들은 저항과 콘덴서, 다이오드 등을 기판에 꽂아 회로를 구성한 후 계측된 값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계산기를 이용해 주파수와 위상을 산출하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생들의 전자회로 실험 보고서 데이터 값은 모두 일정하다.

 21세기 첨단 정보통신 기술강국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우리 대학의 실험실 장비는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대학 내 실험이나 실습교육은 전체 교과과정 중 20%에도 못미치는 낮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실험시간마저 학생들은 이론에 치우친 교육을 받고 있다. 바로 실험 학습이란 명분 아래 또 다른 이론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대학 실험수업이 이렇게 되고 있는 것은 실험 실습용 기자재가 부족한 것은 물론 적합한 장비가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첨단 장비를 보유했더라도 첨단장비를 이용해 실험에 나서기는 커녕 구경조차 힘들다.

 첨단 실험 기자재의 고장을 우려해 학생들에게 개방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전자나 물리, 기계 실험의 기초 장비인 전압계와 전류계, 오실로스코프 등도 고장난 것 투성이다. 이런 환경에서 실험실습에 대한 경험을 쌓는 것은 묘연한 일이다 보니 전자공학과나 기계공학과 등 졸업작품을 제출해야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졸업작품 제작을 위해 전문학원에 다시 다니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

 정보화 우수 대학으로 선정된 B대학 전자공학과 K군은 “대학의 실험실습이 초등학교 자연시간보다 못하다”며 “졸업 작품을 내기 위해 회로구성이나 장비를 사용하려고 전문학원에 다니거나 심지어 졸업작품을 대신 제작해주는 곳에서 구입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첨단 실험실이라고 내건 간판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실험실에는 기업이나 연구소 등에선 사용하지 않는 구식장비들로 수업을 하고 있다.

 원점 조정을 해야 하는 아날로그형 오실로스코프로 실험한 학생들은 기업에 취업하면 디지털 오실로스코프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하고 이로 인해 정작 해야할 연구는 못한 채 장비를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날로그 장비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다행이다. 대학 실험실의 장비들은 대부분 담당 교수와 조교가 관리한다. 대부분의 실험수업은 교수가 아닌 대학원생 조교가 진행하며 이들은 실험실 장비관리에 신경쓰지 못한다.

 대학실험 교육의 질적 저하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실험 기자재의 관리소홀에서 나타난다.

 이와 함께 대학 실험실의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전문 관리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실험실 복도에는 폭발성 위험이 있는 물질들로 가득하고 실험시간에 안전을 위한 사전교육도 없이 학생들이 목숨을 담보로 실험실습을 하고 있다.

 C대학은 실험기자재에 실험한 학생들 이름을 붙여두고 장비가 고장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사용한 학생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실험장비를 관리하고 있다. 전문관리자는 고사하고 실험을 한 학생들이 기기에 대한 관리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전자컴퓨터공학과 장준근 교수는 “최근 대학 실험실에는 정부의 지원 등으로 많은 첨단장비들이 도입됐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인력은 하나도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기부 프런티어 과제 등 국가 과제 연구금은 장비나 실험기자재 구입에 대한 영수증 처리는 가능하지만 이를 관리할 전문인력의 비용처리는 연구금에서 사용할 수 없어 대학이 자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코넬대의 나노기술 실험실은 첨단기자재가 가득한 것은 물론 각각의 장비를 운영할 수 있는 전문 매니저가 실험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 카운슬러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이런 체제로 세계 각지의 대학과 기업에서는 코넬대 나노기술 실험실 장비를 이용해 연구하려고 코넬대 내에 연구분소를 세우는데 열을 올릴 정도다.

 대학의 체계적인 실험장비 관리가 가져오는 성과다. 이 실험실은 실험실 운영비의 80%를 기자재를 이용하려는 기업이나 기타 연구소가 주는 사용료로 충당하고 있다.

 연세대 기계공학과 J군은 “미국에서는 원자에너지를 배울 때는 원자 가속기를 보면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국내 수업은 그저 이론중심으로 실험실습까지 연장된다”며 “학부생들이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서 경쟁력있는 인력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턱없이 부족한 실험실습 시간 뿐 아니라 현장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은 다양한 산업체와 제휴를 맺고 실험이나 실습시간에 산업체가 기초적인 실험과정을 어떻게 응용하는 지 학습할 필요가 있다”며 “산학협동을 활성화하면 대학은 장비구입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경쟁력 향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쟁력있는 인력양성을 위해 실습위주의 대학교육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실습시간조차도 디지털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날로그 장비로 데이터도 측정되지 않는 실습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학의 현주소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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