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디스플레이 연구계는 한국의 연구개발자들을 경이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고품질의 디스플레이 제품을, 그것도 어떻게 그렇게 값싸고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러한 감탄 속에는 그러나 일말의 비웃음도 담겨있다. “상용화를 잘 할지 모르지만 취약하기 짝이 없는 기초 기술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오만이다.
특히 일본의 연구계가 이렇게 생각한다. 일본의 디스플레이 기술 연구개발은 기업 못지 않게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특허 로열티를 받을 만한 원천 기술이다.
일본 연구계는 비록 생산 대국의 자리를 한국에 내줬으나 기초 기술에 있어서 아직도 한국의 연구계와 격차가 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이같은 생각은 절만만 맞는다. ‘양이 변하면 질도 바뀐다(양변질변).’ 국내 연구계의 시각은 이렇다.
비록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 응용기술에만 집중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성과가 쌓이면 언젠가 질적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최근 이러한 기대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부쩍 많아졌다.
세계 최대(40인치 TFT LCD, 63인치 PDP, 15.1인치 유기EL)와 가장 얇은(78㎜ 두께의 PDP) 디스플레이가 모두 국내 연구개발진의 작품이다. 이제는 핵심 부품과 소재쪽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산학연이 똘똘 뭉쳐 세계 디스플레이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디스플레이제조학회라는 게 새로 결성되고 1, 2차 심포지엄을 국내에서 연 것도 상용기술로 시작해 학문 수준으로 격상된 국내 디스플레이 연구계의 위상을 확인케 한다.
산학연을 넘나드는 교류와 협력이 이룬 성과라 할 수 있다.
산을 대표하는 기업은 삼성과 LG이나 국내 디스플레이개발사에서 오리온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워크아웃중이라 이 기업의 연구개발이 힘을 잃은 듯하나 연구개발자들은 여전히 밤샘 연구로 워크아웃을 잊고 지낸다.
이들의 버팀목이 바로 김준동 이사(47)다. PDP사업부문장을 맡고 있는 김 이사는 대우전자와 고등기술연구원을 거쳐 98년에 오리온전기에 합류했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한국과학기술원, 미 버클리대 재료공학을 전공한 재료 분야의 대가다.
회사가 하루빨리 워크아웃에서 졸업해 후배들이 맘놓고 연구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하이디스 역시 삼성과 LG 못지않게 국내 디스플레이 개발사에 큰 역할을 했다. 이 회사 역시 지난해 어려움을 겪다가 시황 호전으로 기사회생했다.
이 회사의 대표주자는 박해성 연구소장 겸 기술팀장(44)과 임영진 제품 개발팀장(41)이다.
박해성 소장은 현대전자 반도체 출신. 연세대에서 전자공학과 반도체 공학을 전공했다. 64MD램에서 256MD램까지 공정개발을 총괄하던 그는 95년 이후 LCD부문으로 옮겨 디스플레이 맨으로 변신했다. 현 하이디스 양산라인의 구축도 진두지휘했으며 반도체 기술을 바탕으로 12인치에서 18인치까지 노트PC용 및 모니터용 TFT LCD 개발을 총괄해왔다. G7과제인 저소비전력 TFT LCD와 산업기반기술개발 과제인 와이드스크린 카네비게이션시스템의 개발 책임자로도 활약해 산학 협동에 기여했다.
임영진 팀장은 LG필립스LCD 출신으로 97년에 합류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업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고투과 방식과 초광시야각에 대한 상용기술, 스마트패널의 개념과 사용제품 개발이 그의 작품이다.
새로운 설계 방식으로 원가와 생산성을 높여 물량이 부족한 이 회사의 약점을 커버해 주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 출신으로 반도체 물리학이 그의 전공분야다.
국내 디스플레이 연구 개발은 주로 기업과 대학에서 이뤄진다. 반면 국책 연구소의 활동은 미미한 실정이다. 디스플레이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이 상대적으로 반도체에 비해 약한 것도 한 까닭이다. 여기에 그동안 디스플레이 기술개발이 전기전자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 것도 영향이 크다. 오랜 역사의 전자업체들과 대학의 전기전자공학에서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디스플레이 기술에 신물질의 적용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화학 관련 전공자의 입지가 넓어지고 있다. 앞으로 몇년 뒤엔 화학과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올 정도다. 이 분야에선 연구소의 역할이 크다.
차세대 디스플레이라고 불리는 유기EL과 전계발광디스플레이(FED)가 대표적이다.
이들 분야에선 일부 대학 교수와 아울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소속 연구원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정태형 ETRI 정보통신원천기술연구소 기초기반연구부장(48)은 국내 유기EL과 플라스틱디스플레이 기술 분야의 얼굴마담이다. 그는 김영관(홍익대), 권순기(경상대), 권오경(한양대), 심홍구(KAIST) 교수와 조현남(KIST), 도이미(ETRI) 박사와 함께 국내 유기EL 기술을 이른 시일안에 일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KIST에 머물던 그는 텍사스공대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한 후 일리노이대 박사 과정을 거쳐 ETRI에 몸담았다. 정 박사는 이론보다는 실제 응용에 관심이 많다.
KAIST·고등기술연구원·오리온전기와는 유기EL에 대해, 삼성코닝·KIST·홍익대와는 플라스틱트랜지스터를 적용한 유기EL을 산학협동으로 연구했다.
정 박사는 “플라스틱트랜지스터와 고분자 EL을 결합하면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에 적용할 수 있는 종이같은(paper-like)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다”면서 “2007∼2010년께 상용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연구조합의 유기 EL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 박사 등이 프런티어라면 김우영 현대LCD 유기EL팀장(42)은 국내 유기EL의 허리층을 떠받치고 있다. 현대LCD는 하이닉스 LCD사업부가 분사해 생긴 회사다.
김 박사 역시 화학과(부산대) 출신으로 미국 머레이주립대와 퍼듀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과 화학연구소를 거쳐 97년부터 현대에 들어와 유기EL을 전담 개발하고 있다. 전장용·휴대폰·PDA용 모노 및 풀컬러 유기EL과 반사형 LCD를 개발한 성과를 올렸다.
그는 특히 한국과 미국의 평판디스플레이 로드맵 위원을 역임하는 등 국제 표준 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유기EL분과 위원회의 간사로 위원장인 정 박사의 부사수다.
이밖에 삼성SDI와 LG필립스LCD 출신의 유한성 박사와 오리온전기의 최종옥 박사(유기EL팀장)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산업계의 국내 유기EL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국내 디스플레이 연구계에 화학연구원 출신들이 각광을 받게 한 후견인이 있다. 바로 박희동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부장(51)이다. 서울대 사법대 화학과 출신으로 오하이오대에서 세라믹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박사 취득후 GE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다가 지난 89년 귀국해 화학연구원에서 줄곧 근무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에서 고효율 형광물질의 개발은 필수. 특히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과 FED같은 차세대 분야에서 중요한 개발과제다.
박희동 박사는 국내에선 척박한 이 분야의 연구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그가 연구원에 결성한 형광물질 연구그룹은 2년만에 국가지정 연구실로 지정될 정도로 형광물질 분야에 있어 탄탄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최근 관심은 백색발광다이오드와 나노분말합성기술. 발광다이오드는 에너지절약기술로 미국과 일본에서 활발히 연구되는 차세대 조명시스템으로 적절한 형광물질이 성공을 좌우한다. 박 박사는 여기에 필요한 고효율 형광물질을 이츠웰이라는 국내 전문업체와 공동 개발해 기술을 이전했다.
또 후배 연구원들과 함께 기능성 나노분말 다량 합성 기술을 개발해 나노기술의 저변을 넓혀 놓았다. 고화질 PDP와 고기능 의료장비에 쓰이는 고효율의 나노크기 형광물질도 개발 성과다.
FED와 3차원(3D)디스플레이는 당장은 상용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나 미래 핵심 디스플레이로 발전할 유망주다.
김종민 삼성종합기술원 박사는 국내에 FED 개발의 선두 주자다.
김 박사는 지난 99년 세계 처음 실리콘 대신 탄소나노퓨브(CNT)를 이용한 컬러 패턴을 재현하는 9인치급 CNT FED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특히 문자 구동 정도에 머물던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영상을 재현해 국내 연구계를 놀랬다. 저전압으로도 기존 브라운관보다 화질이 월등하며 10배나 밝은 FED의 상용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기업체들이 당장 PDP와 유기EL의 상용화에 집중하면서 FED의 상용화가 늦어지고 있다. 김 박사는 FED 상용 기술을 더욱 보완하는 한편 업계와 학계에 걸쳐 두루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KIST의 권용무 박사(45)와 허영 한국전기연구원 박사(45)는 3D 디스플레이 기술의 선구자들이다.
권 박사는 평판디스플레이 연구를 하다가 3차원 영상의 매력에 빠져 지난 94년 이후 줄곧 이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3차원 디지털로 석굴암을 재현하는 기술과 인터랙티브벌티뷰시스템, 웹기반의 동영상 압축기술 등이 그의 연구 성과다. 지금은 이탈리아 밀라노대 방문 연구원으로 있다.
허 박사는 전문 분야는 의료기기이나 이에 필요한 3차원 영상신호처리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실적으로 국내 디스플레이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텍사스주립대 전기공학박사로 연구개발과 함께 멀티미디어부호화 표준 작업과 산업자원부 기술기획평가단 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연구계는 국내 디스플레이의 연구가 그동안 반도체와 전기전자공학의 발전에 힘입었으나 앞으로는 화학과 재료 공학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의심치 않고 있다. 특히 반도체에서 디스플레이로 전환한 1세대의 후광도 받고 처음부터 이 분야를 전공한 30대 연구자들의 활약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게 연구계의 공통된 견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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