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의 시네마테크
인류의 진화를 펼쳐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에는 꽤 흥미로운 장면이 들어있다.
지구의 여명기, 인류의 먼 조상인 듯 보이는 유인원들이 홀연히 외계에서 날아온 모노리스(monolith)에 의해 지력을 갖추게 되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유인원들은 다른 생물종들을 정복하면서 급기야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한다. 큐브릭의 관점에서 도구는 인류문명의 건설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의 폭력적 본성과 투쟁에 더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역사상 끊이지 않았던 전쟁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지난 93년 아프리카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졌던 미군과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전투를 다룬 ‘블랙호크다운(Black Hawk Down, 리들리 스콧 감독)’은 전쟁 그 자체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기에서 전쟁의 명분이나 영웅주의, 휴머니즘적 감상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극히 건조하게 다큐멘터리 터치로 접근한 이 전쟁영화는 14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온통 헬기의 소음과 각종 무기가 빚어내는 살상을 비롯한 전투 자체의 사실적인 묘사에 할애한다. 리들리 스콧은 곧장 앞만 보며 전투의 해부에 나서는데, 이 해부는 대단히 즉물적이어서 마치 전투학 교본을 연상시킨다.
‘진주만’의 조시 하트넷이나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톰 시즈모어, 그 외에 샘 셰퍼드같은 중량급의 개성있는 연기자들이 포진해 있지만 그들이 단지 전투상황을 묘사하는 데 필요한 소품으로서의 역할 정도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역사에서 전쟁영화는 소재적으로 독립된 장르를 형성할 만큼 빈번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라인’같은 탁월한 작품이 영화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영화가 전쟁을 조망하거나 해부하는 방식은 작품마다 다르다.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은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드러내면서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과 회오를 촉구한다는 공통분모위에 서 있으나, 전쟁의 구조적 모순과 지옥도를 시스템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쪽(지옥의 묵시록)과 개인적 경험의 차원으로 다루는 쪽(플래툰)으로 분리된다.
또 영웅주의와 동료애를 부각시키는 쪽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서 있다면, ‘씬 레드라인’은 격렬한 전장의 스펙타클에서 비켜서서 완만한 호흡의 사색과 투명한 슬픔을 안고 있다. 이같은 전쟁영화의 지형도에서 ‘블랙호크다운’은 또다른 전쟁영화의 구도를 달성한다.
이 작품이 이즘의 의미망들을 걷어낸 채 즉물적으로 전쟁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새롭지만, 정치적 공정성 또는 올바름이라는 측면의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모가디슈전투에서 소말리아인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군은 19명이 전사했다. 수치상 이 압도적인 불균형의 의미와 미국에 대한 소말리아인의 증오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지, 미국의 개입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영화는 외면하고 있다. 또 최대한 극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있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동료는 꼭 구한다는 미국식 휴머니즘과 동료애도 여전히 잠복하고 있다.
영화가 역사와 현실이라는 콘텍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블랙호크다운’이 거둔 영화적 성과와는 별개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영화평론가·수원대 교수 chohye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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