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51층에는 벤처정책 주무부처인 최동규 중기청장을 비롯한 벤처국·과장과 장흥순 벤처기업협회장을 비롯한 업계 대표, 학계 대표 등 국내 벤처업계의 얼굴들이 대거 모였다.
벤처게이트로 불거진 현재의 벤처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마련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비공개로 진행될 만큼 심각(?)했던 이날 회의의 결론은 ‘벤처윤리위원회’ 설치였다.
우리나라 벤처리더라 할 수 있는 20여명의 주요 인사가 모여 얻어낸 결과 치고는 참 보잘 것 없다는 게 벤처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전형적인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는 평가까지 더해졌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현재의 벤처위기 핵심은 각종 게이트의 주범이 벤처기업가냐, 사기꾼이냐가 아니라 이같은 위기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시스템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8년말 2042개이던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지난해 9월 1만개를 돌파했다. 97년 8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특별법)’을 마련하고 벤처인증제를 도입한 지 만 4년 6개월 만에 벤처기업이 1만개를 넘어서는 엄청난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 수적인 증가와 더불어 정부는 직간접적 지원도 늘려왔다.
정부는 지난해 4800여억원의 정책자금을 벤처분야에 투자했다. 기술신보 등의 보증잔액도 지난해 9월말 4조1000억원에 달할 만큼 정부의 벤처기업 지원은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심지어 지난해 벤처프라이머리CBO를 통해 수개월 만에 1조원 이상의 자금을 벤처에 수혈하기도 했다. 법인세, 소득세 50% 감면, 취득세 및 등록세 면제, 재산세 및 종합토지세 50% 감면 등 엄청난 세제혜택을 부여했으며 대도시지역에 회사를 설립하더라도 벤처기업은 등록세 3배 중과세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중소·벤처기업 육성시책을 마련해 시행한 정부기관만 12개 부, 2개 위원회, 5개 청에 달한다. 모든 정부부처가 경쟁적으로 벤처지원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벤처기업 20여개 나스닥 상장목표 제시, 투자손실보전제 도입 추진 등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불확실한 정책목표를 설정하거나 벤처기업투자 안전성을 지나치게 보장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오는 2005년까지는 4만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게 정부 의지다. 여기에 민주당까지 나서 올해말까지 2만개의 벤처기업 육성과 이를 통한 50만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로 인해 벤처업계에는 일단 정부로부터 벤처인증만 받으면 ‘최소한 망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같은 비용 개념이 없는 정부지원자금과 정책이 단기간에 시장에 쏟아져나오니 이의 수혜대상이 되기 위해 힘 있는 곳에 줄을 대려고 기업들은 동분서주하고 필연적으로 벤처·권력·언론간의 유착이 생겨나게 됐다. 또 세계 어느 국가도 벤처기업을 단단위까지 집계하고 육성하는 데는 거의 없다.
벤처지원 시스템이 결국 부패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올해 발표된 정부의 벤처정책은 양적 지원 일변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신용·직접대출 확대를 통해 창업자금 공급을 확대키로 했으며 기술신보의 기술창업평가보증 확대를 위한 기술평가센터별 할당제까지 도입, 센터 평가에 반영하는 방안까지 모색하고 있다. 물론 벤처기업의 해외진출 지원 및 경영기초 확충, 벤처기업의 신뢰성 제고 등을 위한 정책도 없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벤처비리 척결의지에 이어 나온 정부의 후속대책을 보자. 제도개선책으로 벤처졸업제 도입을 검토중이라고 했다가 다시 고려하지 않는다고 뒤집었다. 벤처기업특별법이 오는 2007년까지 적용되는 한시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벤처졸업제 도입 자체가 우스꽝스런 얘기다. 벤처기업 평가기관에 대한 실명제 도입 등의 추진도 근본적으로는 벤처기업을 직간접적으로 투자·지원하는 기관들의 실력향상 없이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다. 정부가 벤처평가기관이나 벤처캐피털 등 벤처지원에 관여하고 있는 곳에 대한 인위적인 강화책을 내놓기보다는 우선 이들에 대해 시장경쟁을 통한 질적 향상을 꾀하도록 유도하는 등 벤처생태계를 기초부터 다지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벤처인증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국 벤처가 바로설 수 있다”는 한 벤처업계 관계자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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