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 과학기술부 차장 jklee@etnews.co.kr
요즘 우리 주변은 이른바 ‘패스21 게이트’를 정점으로 한 벤처기업 관련 의혹들로 난리다.
지난 97년 IMF사태 이후 위기 극복의 견인차로 불리던 벤처가 이제 모든 ‘비리의 온상’이 돼 버린 느낌이다. 그간의 온갖 어려움에도 꿋꿋이 버텨온 벤처기업가들이 비난의 대상이 돼 허탈해 하고 있다. 지난 한해 수출액 2억달러 이상을 달성한 벤처기업까지 나왔지만 벤처게이트의 홍수 속에 그 빛이 바래 버렸다.
CDMA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정책 부처의 고위 간부에서부터 언론·국회의원·장관 심지어 대통령 주변에 대한 연루설까지 나와 우리의 심정을 착잡하게 한다. 70∼80년대 유행한 ‘정경유착(政經癒着)’이란 말이 이제 ‘정벤유착’이란 말로 바뀌어 회자되고 있다.
결국 대통령조차 신년 정재계간담회와 국무회의에서 벤처 비리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함께 비리척결을 표명하는 사태를 맞기에 이르렀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편으로는 ‘나홀로 기업’ 창업의 신화를 만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면 된다’는 정신을 되살리는 실마리를 제공한 ‘벤처’가 천덕꾸러기로 한낱 항간의 입방아거리가 돼 버렸다. 하지만 벤처는 지난해에도 가장 높은 수출성장률을 보이는 산업 분야였던 것이 정부의 공식지표로 증명되고 있다. 게다가 올들어 내수경기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고 세계 IT산업의 심장이라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분위기도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이 기회에 벤처게이트로 실망한 분위기를 희망으로 바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년 전 온 나라를 그야말로 뜨겁게 달구고 우리 경제의 희망과 미래로 떠오른 ‘벤처 이미지’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역 의존도가 국가경제의 70% 이상을 차지한다는 우리 입장에서 수출증가율이 벤처만큼 높은 산업이 또 어디 있나를 찾아보면 답은 간단하다.
모든 벤처기업의 공적이 몇 건의 벤처게이트로 인해 벤처기업의 기를 꺾어 놓고 있다. 하지만 벤처기업 모두가 복마전에 휩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벤처 모두가 싸잡아 비난당할 필요는 없다.
새해를 맞아 내실화와 글로벌화를 내세우며 새 출발을 하려는 대다수 벤처가 가장 걱정하는 내용도 어느새 ‘자금문제’나 ‘기술문제’도 아닌 국민들의 반(反)벤처 정서가 돼 버린 형국이다.
올들어 만난 몇몇 벤처 CEO는 “요즘 같아서는 어디 무서워서 벤처하겠습니까”라는 말로 압박감을 표현하고 있다. 불필요한 반벤처 정서의 화살을 대다수 선량한 벤처에 돌려서는 안된다는 게 이들의 하소연이다.
지난해 모두가 어려움을 겪은 가운데 특히 벤처들은 각종 ‘게이트’라는 지뢰가 즐비한 외나무다리를 건너왔고 아직 건너고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필요한 공간은 ‘발자국만큼’의 면적이다. 하지만 발자국 면적만으로 그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벤처들도 벤처정신만으로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아직 다리를 건너고 있는 우리 벤처들에 국민들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벤처에 대한 애정’이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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