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모인 문화산업부장
‘인터넷의 시대는 가고 에버넷(Evernet)의 시대가 도래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석학이자 영원한 문학 청년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69)는 2002년 디지털문화계의 신년 화두를 이렇게 제시한다.
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로 등단한 이래 올림픽기념사업추진위원회·세계화추진위원회·새천년준비위원회 등 한 시대를 이끄는 기획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인 이 교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끊임없이 문화와 정보통신의 접목을 시도해온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교수가 제시하는 ‘에버넷’을 주축으로 한 디지털문화 강국은 우리에게 또다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충고한다.
이 교수의 이 같은 조언은 지난해 42년간 몸담은 교단을 스스로 떠나며 강조한 ‘흑백논리·이분법·사지선다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무한한 창조와 상상력이 발휘되는 사회를 꿈꿔왔다’는 그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
또 90년부터 91년까지 짧은 기간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반가운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는 ‘까치 장관’이라는 별칭으로도 더 자주 기억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이 왕성해지면서 등장한 새로운 가치관이 자칫 혼돈의 시대를 초래할 수도 있는 이때, 경직되지 않으면서 유연하고 일원적이라기보다 다원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이 교수의 조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화의 힘은 영원한 것이며, 국가경쟁력 또한 문화경쟁력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변함없는 신조는 디지털문화의 시대를 여는 새해 벽두에 누구나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다.
―이 교수께서는 지금까지 정보통신과 문화·경영을 접목시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이제 2002년은 그동안 담론에 머물던 ‘디지털문화’가 일반인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습니다. 올해 디지털문화계의 화두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인터넷시대’가 지나고 ‘에버넷’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누구든지(whoever)·언제(whenever)·어디서나(wherever) 효율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던 인터넷은 이제 시공을 초월해 사람과 물건을 이어주는 에버넷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블루투스나 무선랜·홈네트워킹 등의 현실화는 개개인의 생활에 혁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전국의 전력사용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값싼 유휴전력을 사용하고 불필요한 발전소 설립을 줄일 수 있습니다.
‘에버넷’에 이어 주목받는 화두는 ‘스마트화’입니다. 이는 단순히 많은 정보를 소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또는 제어 가능한 똑똑한 정보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디지털사회에서는 경제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규모를 중시하던 기존 기업 가치가 변하면서 이제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상품을 생산해야 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사실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이라는 아마존닷컴은 고객이 인터넷에서 책을 주문하고 사는 것을 도와줄 뿐 그 이상의 부가가치는 창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단순히 다량의 책을 진열해 놓고 독자가 접속하기를 기다리는 아마존닷컴보다 개개인이 원하는 책을 ‘반드시 찾아주는’ 사이트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핀포인트마케팅’입니다. 핀포인트시대의 고객은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자신만을 위한 서비스를 원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고객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가치있는’ 단골이 몇 명이냐를 따져 봐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맞춤형 고객을 관리하다 보면 개인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꼼꼼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디지털시대에는 개인 사생활이 좀더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모 보험사에서 ‘학점이 좋지 못한 고객은 자동차 사고 빈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객의 학점까지 관리한다는 사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고객관계관리(CRM)는 고도화하면 할수록 고객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원합니다. 다시말해 비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드러나지 않은 정보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례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노출된 정보 때문에 ‘내가 정치가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이들을 감시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역으로 보다 투명한 정보의 공개가 요구됩니다. 모든 가치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된다는 ‘트레이드 오프’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맞춤형 상품으로 승부를 거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브랜드의 중요성도 점점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빈부격차는 확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의 성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새로운 사고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기성세대가 정형화한 것처럼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고가제품을 사들이는 것만이 ‘부’의 축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삶의 가치가 다양해지면서 빈부 자체의 기준도 모호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디지털시대에는 물질의 충족보다 ‘가능한 다수의 정보 공유’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디지털시대의 도래가 개인의 생활 방식은 물론 기존 가치관도 바꾸고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각 가정에 인터넷이 보급되고 가족이 사이버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에 따른 폐해도 심심찮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우선 ‘왜 사이버공간에서 부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사이버공간은 실제 세계보다 감시가 허술하고 자유롭습니다.
음란물을 엿보는 것이나 비행을 일삼는 것이 현실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욕망을 무조건 통제하는 것만이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디지털문명의 부정적인 면만 들여다보지 말고 이를 적극적으로 역이용할 것을 충고하고 싶습니다. 가령 남편이 채팅과 게임에 중독돼 있다면 아내는 이를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매일 e메일을 통해 의사소통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이자 문학가로서 그동안 100여편이 넘는 작품을 펴내신 만큼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 n세대 사이에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드러나는 언어파괴현상과 영어 사용 확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e메일이나 채팅창에 국적을 잃은 언어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우리말 파괴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온라인의 언어오염이 오프라인으로 전도되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언어사용문제에 있어 온오프라인은 명확히 구분되는 만큼 이것이 사회문제로 번질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인터넷에서 영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직 1%도 채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인터넷 때문에 우리말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지적은 적절치 않습니다.
―최근 디지털문화가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하면서 기술만 남고 휴머니티는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본격적인 밀레니엄시대의 휴머니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인터넷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밀레니엄시대는 개인 또는 집단주의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사회를 지향합니다. 네트워크사회에서는 ‘함께, 그리고 따로’를 추구하게 됩니다.
다시말해 내 책상 위의 데스크톱은 ‘내 컴퓨터이면서 세계가 공유하는 컴퓨터’이고 이에 따라 디지털시대의 인간상도 복합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다원적 인간만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 단순히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방면에 관심의 촉수를 뻗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중’이 아니라 소위 삼중, 사중 인격자가 돼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디지털시대입니다.
―수십년간 문화와 정보통신의 미래를 남보다 앞서 제시하신 만큼 IT 한국에 대한 기대감도 매우 크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점점 고도화하고 급변하는 IT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으로 보십니까.
▲디지털시대는 덩치가 큰 민족보다 소수민족이 덕을 보는 시대입니다. 저는 한국이 단기간에 인터넷 강국이 된 이유를 국토의 크기에서 찾습니다. 광케이블을 통해 순식간에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땅덩어리 때문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통해 무수한 소수의 커뮤니티가 활성화하면서 이와 관련한 비즈니스 모델도 수천, 수만개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게임산업을 비롯해 타국보다 소프트웨어 콘텐츠가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제조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것처럼 ‘문화가 밀레니엄시대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002년에는 디지털시대에 걸맞는 발상의 전환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33년생 △56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60∼72년 서울신문·한국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 논설위원 △87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87년 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장 △90∼91년 초대 문화부 장관 △94년 국제화추진위원회 위원 △95년 이화여대 인문과학대 국문학과 석좌교수 △95년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 △97년 산업디자인발전자문위원회 초대 위원장 △99년 3월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99년 4월 대통령 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현 중앙일보 고문, 이화여대 명예교수 △저서:‘저항의 문학’ ‘축소 지향의 일본인’ ‘기호학 사전’ ‘상상력의 거미줄’ 외 다수
<정리=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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