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 정보기술(IT) 발전의 도약대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 IT산업은 소프트웨어 개발능력을 키웠고, 대형 시스템통합(SI)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의 주역들은 지금 한국 IT산업을 이끌고 있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은 감동의 순간을 빠르고 정확하게 지구촌 사람들에게 전달한 서울올림픽 IT시스템을 ‘장외 금메달 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서울올림픽 때만큼 뭔가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철저히 상업화된 월드컵의 운영과 마케팅 권리가 국제축구연맹(FIFA)에 있기 때문이다. 사업자 선정이나 파트너·스폰서십 체결같은 업무가 모두 FIFA의 권한이다. 정보통신부문도 예산부터 시작해 시스템 구성과 개발업체 선정, 일정 조정까지 모두 FIFA가 관할한다. 한국서 열리는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업체가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대회 운영시스템 개발과 시스템통합의 주 사업자는 스위스의 유로테크라는 회사다. 그리고 자원봉사자와 선수·임원 등록, 의전 등 대회관리 시스템과 미디어정보 시스템은 스페인의 슐렘버저세마가, 경기결과 시스템과 해설자정보 시스템은 프랑스의 델타트레라가 개발중이다. 한국의 쌍용정보통신은 개최국 SI업체로 선정돼 시스템 설치와 소프트웨어 한글화, 수송시스템과 그룹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시스템 개발 총괄 프로젝트 관리와 예산 집행은 컨설팅업체 AT커니의 몫이다.
IT 파트너도 마찬가지다. 네트워크·통신 장비는 어바이어, 프린터와 복사기는 후지제록스, PC와 서버는 도시바가 공급한다. 인터넷을 통한 월드컵 프로모션은 야후가 맡고 있고, 대형 디스플레이 장비는 JVC가 공급한다. 이들은 마케팅 효과를 노려 엄청난 돈을 내고 제품까지 지원한다. 국내 통신망을 가진 한국통신이 통신서비스 파트너로 ‘당연히’ 참여하는 것이 전부다. 도시바가 한국에 데스크톱을 공급하지 않는 탓에 그 부분만 LGIBM이 공급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월드컵 기간에 인터넷 서비스는 둘로 나뉘어 운영된다. 우선 슐럼버저세마가 제공하는 ‘MIS-Info’라는 FIFA 내부 인트라넷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FIFA 직원, 기자단, 대회 임원 등을 위한 홈페이지 역할을 한다. 또 하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날 그날의 경기 결과나 월드컵 관련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야후가 스폰서를 맡고 있다. 보안문제 때문에 두 시스템은 서로 연결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정보시스템부문은 한국 기업이 개입할 수 없다. 다만 쌍용정보통신이 지역 사업자로서 FIFA와 조직위, 개발업체의 시스템을 잘 결합해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운영할지가 관심사일 뿐이다. 쌍용은 이번 월드컵의 경험을 살려 2003년 중국 여자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2006년 카타르 아시안게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주경쟁에 뛰어들 계획이다.
결국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통신시설과 서비스가 될 것 같다. 교통·숙박문제나 대기환경부문에서 일본보다 낮은 점수를 받고 있지만, 정보통신 환경만큼은 앞서기 때문이다. 정보시스템은 FIFA가 일괄적으로 공급하기 때문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한국통신 인프라가 NTT보다 뛰어나고, NTT는 현물투자가 아닌 사용료를 받는 계약이어서 FIFA와 불협화음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보다 경기장 완공이 늦은 대신 한국이 최상급의 경기장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춘 것도 강점이다.
100% 광통신망에다 사고에 대비해 모든 것이 2중화돼 있고, 방송 중계선은 위성까지 포함하면 3중화 체제를 갖췄다. 통신망 속도도 프랑스 월드컵이 512Kbps였지만, 내년 월드컵은 2Mbps 용량의 두 회선을 활용하게 된다.
이밖에도 한번 등록하면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무선 LAN 서비스를 경기장과 공식 행사장 전체에 제공할 계획이고, 경기장과 관련 호텔의 공중전화에서도 노트북 접속이 가능하게 할 예정이다. 관광객들도 별도의 ISP 가입 없이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기자와 관광객에게 프로그램 CD를 배포하기로 했다.
차세대 통신서비스도 준비중이다. KT아이컴이 IMT2000 서비스를 제공하고, KTF는 영상으로 고속 데이터와 e메일 송수신이 가능한 ‘cdma2000 1x EV-DO(EVolution Data Only)’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데 보도진과 FIFA 관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서비스할 계획이다. 그리고 주파수공용통신(TRS) 서비스를 도입해 FIFA 운영요원, 수송, 관리 분야에 2000대 정도의 단말기를 공급한다. 한국통신은 월드컵 주관 방송사인 HBS와 방송중계 사업권자로도 계약했다. 경기장의 카메라에서부터 국제위성지구국까지 모든 방송중계망이 100% 디지털(270Mbps)이며, 월드컵 대회 최초로 MPEG 코덱을 사용해 영상을 압축·전송함으로 더욱 생생한 경기장면을 세계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국제방송센터(IBC)가 한국에 설치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는 경기장면이 세계 200여 방송사에 공급된다.
월드컵의 운영 특성상 정보시스템부문에서는 할 일이 많지 않지만, 스폰서를 따낸 세계적 기업과 어떻게 제휴하고 그 속에서 무엇을 얻어내느냐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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