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의 인기가 뜨겁다. 원작소설이 115개국에서 46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돼 1억6000만부가 팔렸고 영화는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작가 조앤 롤링은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유명작가라는 찬사와 함께 돈방석에 앉았다.
아시아 최초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판한 국내 출판사는 46억원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급부상했다. 내달 국내 개봉을 앞둔 해리포터 영화는 예약이 쇄도하고 포털사이트는 해리포터 코너를 만들었고 쇼핑몰에서는 기념품을 판다.
아이들뿐 아니라 일부 어른들까지 해리포터에 열광한다. 자녀가 보던 책을 우연히 보다가 빠져들었다는 부모도 있다. 해리포터는 작가의 상상력과 마케팅이 결합된 세계문화산업의 쾌거다. 해리포터는 이제 출판을 넘어 문화산업을 넘어 문화 권력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며칠전 국내 출판가에서는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는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었다. 학술서적 출판사들이 불법 복제가 너무나 횡행해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정부의 대책이 없을 경우 출판사 등록증을 국가에 반납하겠다고 했다.
이들의 말이 결코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식사회에서 불법복사물이 유통돼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했던 시절 불법 복사물을 통해서라도 지적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래서인지 타인의 지적생산물에 대한 대가 지불에 야박하다. 우리 사회의 불법복사 행태는 벌써 오래 전에 그 심각함이 출판의 존립 자체를 불안하게 했고 이제 출판사들은 생존 차원에서 정부의 대책과 우리의 인식변화를 바란다.
한 조사에 의하면 500명이 수강한 경영학 과목에서 4만원짜리 교재를 구입한 학생은 단 두 명이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가 1만원짜리 불법 복사물을 구입해 공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학술 서적은 500부 나가는 게 드문 상황이며 반품률이 85%에 이른다는 출판사의 하소연에 수긍이 간다. 이런 상황에서 학술 서적을 출판하겠다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학술서적의 발행부수가 5년 전에 비해 86%나 줄어들고 발행종류는 12%나 감소한 것도 다 그럴 만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학술 출판이란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비자를 이어주는 고리이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이 나오고 발전하고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지식의 총량이 많아져 건전한 지식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 복사·복제가 횡행하니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필생의 연구물을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은 사회 전반의 지적후퇴를 가져오게 된다.
얼마전 국내 교수들이 외국의 논문을 표절했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 교수들의 도덕적 책임과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불법복사물로 공부하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지적 생산물에 대한 가치에 무감각하고 지식산업이 발전하지 못해 지식의 공유보다는 도용에 익숙한 분위기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21세기는 지식사회다. 지식이 개인과 기업, 국가와 사회의 부를 좌우하는 시대다. 이제 우리는 문화산업에 눈뜨고 문화콘텐츠의 중요성을 안다. 그런데 기형적으로 지식산업은 지적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전문 분야의 깊이있는 지식은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본 뼈대다. 전문지식이 없고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과 유통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사회가 아니다.
그 언제보다 ‘지식’을 떠드는 요즘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지식산업의 발전에 저해되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자. 지식사회에서는 지식산업이 자리를 잡아야 하고 대중적이든 전문적이든 다양한 지식이 생산, 유통, 축적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학술 서적과 출판사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우리가 어찌 문화를 말하고 지식을 말하겠는가.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나서야 하며 우리 사회도 불법 복사 문제의 심각성에 새롭게 눈을 뜰 때가 됐다. 해리포터가 나온 영국에는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세계적 학자들과 유수의 출판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은미 기획조사부장 emk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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