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상하이의 김대리

 지난 23일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전자박람회(NEF) 첫날. 자사 홍보물을 쌓아놓고 선 김 대리는 기대와 의욕으로 가득찼다. 30여년 역사에 전세계 1400개 업체가 참가하는 규모라면 뭔가 큰 성과를 거두고 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시장이 어디 보통 ‘큰 떡’인가. 우수한 기술력에 현지 마케팅만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최대의 시장이다.

 전시회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두시간만에 잔뜩 쌓아놓은 홍보물이 날개 돋친 듯 사라졌다. 뭔가 개운치 않았던 김 대리는 계단에 수백장의 홍보물을 모아놓고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심지어 김 대리 옆부스의 또다른 한국인 직원은 지갑이 없어지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열명 중 아홉은 구경꾼이고 그중 넷은 전문 소매치기인 것 같다”며 김 대리는 혀를 내둘렀다.

 둘째날부터 조금씩 옥석을 구분하기 시작한 김 대리는 화동지역에 20∼30개의 사무소와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현지 사업가의 판매대행 제안을 받기도 했고 랴오닝성을 중심으로 사업을 벌이는 5∼6명의 사업가와 진지한 상담을 벌이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연간 10만달러 이상 판매를 조건으로 든든한 판매대행사를 잡아 중국시장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회사의 야심찬 계획을 곧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시 3일째부터 김 대리는 ‘14억명에게 하나씩만 팔아도…’ 하는 어설프고 막연한 계산을 더이상 하지 않았다. 1200개나 참가한 중국업체 부스를 둘러본 후에는 ‘국내 사양산업을 옮겨와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상상도 말끔히 접었다. 해마다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는 상하이의 경제규모는 GDP 550억달러(2000년)에 이르고 지난해 6개월 동안만 2만7000여개의 법인이 생겨나는 등 세계 경기침체 와중에도 갓잡은 생선처럼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자유치에 혈안이었던 상하이·화둥지역 관리들은 한국의 어지간한 전자업체는 이미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다고 판단, 아예 인수에 나서겠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첨단 디스플레이와 반도체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앞선 기술력’으로 중국시장을 ‘침공’하러 왔던 ‘맹장(猛將)’ 김 대리는 전시회 마지막날에는 어느새 조심스럽고도 약간은 주눅든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 대리가 난생 처음 본 중국은 그렇게 다가왔다.

 <상하이=산업전자부·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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