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와이드웹(WWW)’ 시대가 가고 ‘그리드’ 시대가 온다.
1969년 10월 25일은 인터넷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바로 인터넷이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꼭 만 32년 전인 이 날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와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처음으로 컴퓨터를 연결해 첫 메시지를 전송했다. 국방부 산하 첨단연구계획국(ARPA)이 32년 전 10월 25일 패킷 교환망을 이용한 ‘아파넷(ARPANet)’ 구축에 성공한 것이다.
이어 73년 아파넷 개발팀의 빈튼 서프와 로버트 칸은 서로 다른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표준 프로토콜인 ‘TCP/IP’를 개발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현재 인터넷의 기술적 근간이 된 WWW가 구현되고 이를 실현한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개발됐다. 이후 인터넷은 디지털혁명이라 불리며 삶의 기본 인프라로 자리잡았다. 지난 32년 동안 인터넷은 개인의 생활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경을 초월해 현실과 다른 사이버공간이라는 영역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산업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주고 받고 개인끼리의 정보교환 방법도 크게 달라졌다.
WWW 기반의 인터넷 이용이 일상화되면서 기업의 사업형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터넷 개척자로 불리는 야후의 제리 양과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등 인터넷시대 주역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디지털공간의 특성을 활용해 기존 기업이 수십년 동안 이룰 수 있는 사업 성과를 단기간 내에 이룩해 내는 경영의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한 마디로 웹이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지구촌을 하나로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고 21세기 신대륙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데이터를 안전하게 전송할 수 있는 새로운 통신망 정도로 생각했던 인터넷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서부개척시대 골드러시에 빗댄 ‘인터넷 러시’라는 말이 유행할 때도 인터넷은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은 또 하나의 정보혁명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역시 기존 산업과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서서히 재조명되고 있다. 열풍처럼 불었던 닷컴 열기가 식으면서 인터넷은 정보혁명의 마지막 종착역이 아닌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만물이 진화하듯이 ‘인터넷도 진화한다’는 명제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IT혁명의 대명사였던 인터넷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분야로 접목을 시도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광통신과 위성통신기술의 발달은 네트워크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간벽지·사막·섬 등 오지까지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 한 차원 높은 인터넷을 재창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세계는 실시간으로 멀티미디어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길로 치닫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인터넷 주소체계인 ‘IPv6’의 출현으로 모든 정보기기에서 전기·전자제품, 자동차, 기계장비에 이르기까지 마치 인터넷에 연결된 PC처럼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코 앞에 다가왔다.
이같은 변화의 시초를 마련한 것이 바로 차세대 인터넷의 출발점이라 불리는 ‘그리드(GRID)’다. 그리드는 WWW 기반 인터넷의 다음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물음에 명쾌한 해답은 아닐지언정 단초는 줄 수 있는 기술이다. 진공관의 음극과 양극 중간에서 전류의 흐름을 제어하는 ‘격자(格子)’에서 유래한 그리드는 인터넷 확산의 기폭제가 되었던 WWW과 차세대 인터넷을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다.
이는 미국 시카고대학 이안 포스터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창시했으며 한번에 한곳만 연결할 수 있는 웹과 달리 신경조직처럼 작동하는 인터넷망 구조를 말한다. 그리드는 컴퓨터에 특정 프로그램을 설치해 세계 곳곳의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첨단장비를 연결해 마치 가상의 슈퍼컴퓨터처럼 쓰자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가상 슈퍼컴퓨터의 핵심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십∼수백만대의 PC를 네트워크로 묶어 제어한다는 것. 현재 전세계에는 약 4억대의 PC가 있다. 그러나 PC 대부분이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 쉬는 때가 훨씬 많다. 이 때문에 이를 잘만 활용해 가상 슈퍼컴퓨터로 묶는다면 지금의 슈퍼컴보다 수천∼수만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유휴자원을 이용해 비용을 크게 줄이면서도 대량의 데이터를 뚝딱 처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드는 인터넷으로 잘 알려진 월드와이드웹과 크게 다르다. 지금의 인터넷은 모든 정보를 담은 서버에서 인터넷 이용자가 필요한 정보를 받아 보는 수직구조로 이뤄져 있다. 이 사이트에서 저 사이트로 쉽게 옮겨다니며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여러 사이트와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드는 인터넷 이용자가 다른 이용자와 수평적으로 직접 연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동시에 여러 곳에 연결할 수 있다. 인근 지역의 동료는 물론 지구 반대쪽 컴퓨터와 연결,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컴퓨터에서 찾은 정보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보면서 한 사람의 설명을 듣거나 함께 설계도면을 그리는 일도 가능해진다. 아울러 한 컴퓨터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컴퓨터를 원격조정해 복잡한 계산을 쪼개 시킨 뒤에 다시 합쳐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리드는 새로운 IT의 사회간접자본이라고 불린다.
전문가들은 “WWW가 IT의 맛을 보여줬다면 그리드는 비전을 보여줄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실제로 그리드 네트워크가 완성되면 기존 컴퓨터로는 힘들었던 고속연산과 대량의 데이터처리가 가능해 생명공학(BT)·환경공학(ET)·정보기술(IT)·나노기술(NT) 분야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인터넷이 새로운 기술에 바통을 넘겨주고 뒤켠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융화해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주요내용과 의미
‘그리드포럼 2001’은 인터넷 탄생일인 10월 25일을 기해 인터넷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준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포럼은 차세대 인터넷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사회간접자본으로 떠오른 그리드 산업을 재조명하고 육성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는 뜻깊은 자리다.
이번 행사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원장 조영화) 주관으로 26일까지 이틀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그리드포럼코리아(http://www.gridforumkorea.org) 창립총회와 함께 열린다.
그리드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춰 볼 때 이번 행사는 그리드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그리드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정보기술분야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슈퍼컴퓨터센터와 정부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지난 98년부터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유럽도 ‘e유럽’ 구현을 위해 99년부터 그리드 사업을 시작했다. 이웃 일본도 아시아에서 IT기술 선도와 기초 과학기술분야의 발전을 위해 정부출연연구소, 대학을 중심으로 지난해 부터 그리드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역시 정보통신부가 차세대 인터넷 기반구축과 세계 5위의 지식정보강국 도약을 위해 내년 부터 앞으로 5년 동안 총 435억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국가 기본계획을 수립, 발표했다.
그리드포럼에서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이 같은 전세계적인 그리드 열풍을 반영하듯 내로라하는 그리드 전문가가 대거 참석한다.
찰리 카레트 세계그리드포럼 의장, 윌리엄 존스톤 NASA 그리드 책임자, 파브리지오 가글리아디 유럽 데이터 그리드 책임자, 푸보 장 플랫폼 컴퓨팅 부소장이 초청연사로 나서 자국에서 추진하는 그리드 연구동향과 세부 연구과제 수행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리드워킹그룹에서는 권장혁 교수(KAIST), 손동철 교수(경북대), 강경우 교수(천안대) 등 주로 국내 연구진이 참석해 CFD 그리드, 고에너지 물리학 그리드, 그리드 툴키트 등 분야별 그리드에 대한 기술현황과 과제를 짚어본다.
또 이번 행사에는 서울대·KAIST·포항공대 등 54개 대학,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국방과학연구소 등 11개 정부출연연구소, 삼성종합기술원·자이온리눅스시스템즈 등 75개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관계자들이 참석해 산·학·연 IT·BT·NT·ET분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이 자리에서 전문가들은 국내 그리드 기술개발 현황을 점검하고 전체 그리드 산업의 청사진을 그릴 계획이다.
이틀에 걸쳐 열리는 이번 세미나를 주관한 KISTI는 그리드 소개와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지난 3년 동안 수행해 온 그리드 연구결과를 발표해 그리드의 대한 일반인의 이해도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그리드포럼코리아 이상산 사무국장(KISTI·슈퍼컴퓨팅센터 센터장)은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기관과 참가인원이 140여개의 기관, 500여명에 이른다”며 “그리드포럼과 이번 세미나가 21세기 인터넷 관련 신산업을 육성하고 차세대 인터넷 기반을 조기에 구축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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